제 1 장 인생관
1) 인생이 무엇이냐
① 지금까지 인생문제는 미로
내가 왜 왔으며, 내가 왜 살아야 하며, 어디로 가야 하느냐? 태어난 것을 여러분 스스로 태어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태어나기는 했으되 무슨 동기로 태어났으며,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지, 나를 낳게 한 동기와 목적을 알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나기는 났으되 내가 나고자 해서 난 것이 아니요, 살기는 살되 내가 살고자 해서 사는 것이 아니요, 죽기는 죽되 내가 죽고자 하여 죽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들어 무엇을 자랑할 것이냐? 자기 자신이 나고 싶어 나지도 못하고 자기 자신의 그 무엇을 갖고 살지도 못하고, 죽음의 길을 피할 수도 없는 자신을 가지고 무엇을 자랑해 보아야 처량할 뿐입니다. 났으니 살아야 할 운명이요, 또 그렇게 살다 가야 할 운명입니다. (7-178)
오늘날까지 철학은 역사시대를 통해 인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해 왔습니다. 참된 인간의 가치, 인간을 어떻게 완성할 수 있으며 인간 자체로부터 승리하여 만우주에 자랑할 수 있는 승리의 완성격을 어떻게 이루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 수많은 철인들이 나와 고심하면서 별의별 주장을 다 했습니다. 그러다가 지금에 와서 인간을 통해 사상체계를 세워 놓았던 모든 주의, 주장들이 이미 실험을 필하였고, 또 이미 낙제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다 탈락해 버렸습니다. (141-125)
왜 인간이 이렇게 어영부영 살면서 죽기를 싫어하고, '왜 살아야 돼? 근원이 어떻게 돼서?' 하는 등의 의문이 많습니다. 그 모든 의문은 인간의 철학 서적을 통해서는 해결 못합니다. 철학이라는 건 지금까지 하나님을 찾아 나가는 길을 개발한 것입니다. 종교는 뭐냐? 하나님을 알아 더불어 사는 생활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종교생활입니다. (186-12)
인생을 이렇게 살다 가는 목적은 무엇인가?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동기가 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었으니 목적도 나만의 것이 아님에 틀림없습니다. 사는 데 있어서 행복한 자리를 싫어하는 자가 어디 있으며, 호화찬란한 자리에서 살고 싶지 않은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나입니다. 그렇지만 또 자신을 자랑하고 싶고, 마음대로 살고 싶고, 마음대로 남아지고 싶은 나입니다. 이런 심정의 교차점을 지닌 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한 80살 살았다고 했을 때, 그 가운데 밤에 자는 시간을 제하고 나면 40년으로 줄어듭니다. 절반으로 줄어드는 것입니다. 자는 것도 사는 건가요? 자는 것은 죽은 것과 같습니다. 자는 것은 죽은 목숨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24시간 가운데 살겠다고 허덕이는 시간은 절반밖에 되지 않습니다.
또 거기에서 밥 먹는 시간을 한 시간씩 빼 버리고 나면 어때요? 밥 먹는 데도 한 시간은 잡아야 됩니다. 또 그 가운데 친구 잔칫날, 이웃 동네 어른의 환갑날, 누구 죽은 날, 장사지내는 날, 병들어 누워 있는 날, 별의별 날을 다 제하고 나면 일생에서 산다고 하는 날이 절반이나 될 것 같아요? 요전에 계산해 보니까 산다고 하는 날이 7년이 나옵니다. 그 7년 가운데 진정으로 살았다고 할 수 있는 날이 며칠 나오느냐 말입니다. (49-336)
일생이라는 건 빠릅니다. 철들어 세상 물정 알고 이렇고 저렇고 하다 보면 사십이 넘고 오십이 넘어 뭐 10년은 잠깐입니다. 10년이면 육십 잠깐이고, 육십 되면 칠십 잠깐이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뭐 일장춘몽이라는 말이 실감납니다. (139-153)
자기 운을 100만큼 타고 난 사람이 120만큼 살다 가면 그 후손을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운은 고무줄과 같아서 조인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80만큼 살다 간다면 20만큼의 복을 남겨, 그 운세를 후손 앞에 상속해 주고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78-333)
운명은 변경할 수 있지만 숙명은 변경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변할 수 있어요? 자기 아버지의 아들딸로 태어난 것이 변할 수 있어요? 그 나라의 주권이 아무리 강하고, 그 나라의 관습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아버지의 아들딸은 변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복귀의 길은 숙명적인 길입니다. (172-55)
출발을 잘못하면 난데없는 곳으로 가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가 대해(大海)를 항해하더라도 출발한 항구에서부터 나침반을 중심삼고 가야 할 목적지를 향하여 방향성을 그려 놓고야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출발한 항구가 어디냐? 모르고 있습니다. 나침반을 가지고 피안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는, 목적지를 그려 갈 수 있는 방향성이 어디 있느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게 꼬불꼬불 제멋대로 왔다갔다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은 제아무리 한다고 해봤자 인간으로 끝나는 겁니다. (172-28)
일생을 거친 후에 나는 어떠한 곳으로 갈 것인가? 이것이 인간들이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종교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철학도 역사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동원돼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자신도 이런 운세에 사로잡혀 이끌려 가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차피 가야 할 내 자신이라 할진대, 이 몸은 어디로 가려고 하느냐? 이 마음은 어디로 가려고 하느냐? 또 이 생명은 어디를 향해 기울어지고 있으며 내 심정은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내 소원 혹은 소망과 이념은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어차피 가야 할 운명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가 죽는 날 이 몸은 흙에 묻힘으로써 끝날 것입니다. 그러면 몸이 묻히는 그날 이 마음도, 이 생명도, 이 심정도, 이 이념도, 혹은 소원까지도 같이 묻혀 버리고 말 것인가?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인가? 여기에 확실한 내용과 확실한 해결점과 확실한 목적관을 세워 놓지 않는 한, 이는 불행한 사람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8-194)
매미 알이 매미가 되기 위해서는 굼벵이시대, 유충시대가 있습니다. 유충시대에는 물 구덩이에 살고 혹은 땅 구덩이에 있는 구멍 속에 산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이 가야 할 길은 그게 아닙니다.
대공(大空)을 날 수 있는 길로 가야 되는 것입니다. 날기 위해서는 아무리 땅 구멍을 파고 들어가거나 물에서 헤엄을 치고 다닌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무엇을 준비해야 되는데, 그게 절대조건이라는 것입니다. 없어서는 안 될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유충시대에서 성충시대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유충시대에 날 수 있는 만반의 체제가 준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반대되는 요소인 껍데기를 벗고 정비할 수 있는 한때를 반드시 거쳐야 됩니다. 허물을 벗어야 됩니다. 물 속에서 살 때는 넓적해야 되고, 물 위에 떠 다니기에 필요한 모양이 적격이겠지만, 공중에서 날게 될 때에는 그래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맞게끔 모든 것이 갖추어져야 됩니다. (120-236)
우리는 무엇을 중심삼고 태어났으며, 무엇을 중심삼고 가야 될 것이며, 무엇을 목적으로 삼고 가야 될 것이냐? 이것은 하나님을 빼놓고서는 절대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빼놓고는 동기 없는 인연이 되는 것입니다.
동기를 갖지 못한 사람은 어떤 일을 성사시키려고 하더라도 그 결과는 거두어질 수 없고, 가치를 인정받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건물을 지을 때는 설계자가 설계한 설계도에 따라 건축을 하게 됩니다. 설계의 원본도 없이 지어진 건축물은 설계자가 목적한 건물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21-100)
가을 절기가 왔다는 사실은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겨울은 생명이 있는 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 노정입니다. 생명을 가지지 못한 것은 다 여기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겨울이 오기 전에 새로운 생명을 주입하라는 것입니다. 새 생명은 새로운 사랑을 중심삼은 새로운 주의와 사상, 그리고 새로운 인생관, 새로운 세계관, 새로운 우주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겨울 절기를 통과하지 못합니다. 겨울 절기를 통과할 수 있는 생명력을 가지게 되면 그걸 통과하는 과정은 힘들지만 가면 갈수록 봄날이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봄날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35-45)
① 본래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태어난 인간
본래 우리 인간은 자의에 의해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또, 부모면 부모 자신들이 이러이러한 아들딸을 낳겠다는 계획 아래 태어난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우리들은 부모의 요구에 의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의 섭리를 중심삼고 우리가 존재하게 된 근원을 파고 들어가 보면, 우리 인간은 섭리의 기원과 일치되고, 그 기원을 중심삼고 움직여 나가는 역사와 관계를 맺는 중대한 책임을 지기 위한 하나의 생명체로 이 땅 위에 보내졌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사과정에 있는 나 자신, 그 가운데 살고 있는 우리 개체가 아무리 작다 하더라도 하나의 개체로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34-155)
인간 자체가, 자기가 태어난 것이나 자기를 주장할 수 있는 기원이 어디냐? 이 대우주 원칙 앞에 인간을 주장할 수 있는 기원은 어디서 찾아야 되느냐? 우리 인간은 태어난 결과적 존재인데, 결과적 존재가 원인을 알지 못하고 자기를 주장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정신 빠진 녀석들입니다. 전부 다 미치광이라는 것입니다. (83-191)
태어나기를 왜 태어났느냐 하는 문제, 하나님이 인간을 왜 지었고, 천지만물을 왜 지었느냐 하는 문제, 그 결론은 간단합니다. 하나님도 사랑의 대상이 필요하기 때문에 사랑의 대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아무 것도 아닌 모양의 나 같은 존재는 있으나 없으나다'하고 생각하지요? 그러지 말아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는 데는 부모 앞에 자식이 잘났다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이야 못났든 잘났든 사랑하는 것입니다. 병신자식을 둔 부모의 가슴이 더 아픈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천지의 중심이 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은 여러분이 잘나고 못난 것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본성에 사랑의 그 바탕을 갖고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왜 지음을 받았고 우주는 왜 창조되었느냐 하는 걸 알아야 됩니다. 사랑의 이상을 완성시키기 위해 지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130-44)
하나님이 왜 천지만물을 지었고, 하나님이 나를 왜 지었어요? 사랑 때문입니다. 나는 왜 태어났느냐?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태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나서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살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내 가정에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과 더불어 내 사회에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과 더불어 내 국가에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과 더불어 내 세계에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97-266)
나라는 것은 부모에게서 무엇을 받아 가지고 태어났느냐? 생명의 연결체로서 태어났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하나되는 자리에서 어머니 아버지의 생명력의 가치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 생명력은 사랑에 의해서, 그 생명력과 사랑은 우주목적을 완성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목적을 완성하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남자면 남자, 여자면 여자로서의 어떤 목적, 대우주목적의 협조체로서 스스로를 완성하기 위해서 이와 같은 생명력을 중심삼은 결합에 의해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110-72)
우리가 태어나길 왜 태어났다구요? 무엇 때문에 태어났다구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여기서 '꽝!' 하면 하나님의 머리에 '띵!' 하고 통할 수 있는 그 사랑이다 이겁니다. 여러분들이 무엇을 가지고 못에다 '빵!' 던지면 파문이 못 가장자리로 퍼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우주 가운데 사랑을 '팡!' 던지면 온 우주에 파문이 일 것이다 이겁니다. 그런 놀음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무엇으로 큰 파문을 일으키느냐 하는 게 문제입니다. (103-254)
하나님은 누구냐? 창조주다. 창조주는 누구냐? 종교세계에서 개념을 잡기를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이러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무슨 아버지예요? 어떻게 된 아버지예요? 이게 막연하다는 것입니다. 빌려 온 아버지예요, 이웃 동네 아버지예요, 뭐 양아버지예요, 무슨 부모예요? 그렇지 않으면 처갓집 부모예요, 시집 부모예요? 아버지라는 말은 다양합니다. 근본을 해결 못하고는 아무리 환경이 확대된 그 세계에서 해결하려 했댔자 그것은 해결이 안 나는 것입니다. 천만 년을 가도 해결이 안 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과 하나님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 할 때, 여러분은 하나님이 아버지라고 느껴져요? 나보다도, 내가 있기 전에 더 확실한 것이 어머니 아버지입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나보다 먼저 있기 때문에 내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게 될 때는, 내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 전에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있다고 주장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게 올바른 정의입니다. 어머니 아버지를 제쳐 버리고 내가 있다고 하는 주장은 어리석은 주장입니다. (188-190)
인간은 제1의 원인적 존재가 아닙니다. 제2의 결과적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있다는 것을 말하기 전에 어머니 아버지가 있음을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근본에 들어가서 우주의 근본되는 하나님이라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맨 최초로 해결지어 놓아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 이겁니다. 어머니 이상, 아버지 이상, 조상 조상 해서 올라가게 되면 하나님이 되지요? 이런 논리를 추구한다면 나를 주장하기 전에 하나님을 결정지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다, 그는 내 아버지다, 그 아버지는 어떠한 아버지다 하는 것을. 그래서 우리 통일교회는 이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188-190)
본연의 출발점을 바로 잡아라, 바로 찾아라 이겁니다. 인간은 결과적 존재이므로 원인의 기점에 갖다 맞춰라 이겁니다. 원인의 기점을 맞추되, 그 기점이 맹목적 기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이 인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인격을 가진 사람에게 있어서도 지정의의 모든 양심적 작용의 내용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동기도 원인적 내용 이상의 동기여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절대적이어야 됩니다. 한번 출발한 것이 그릇되었다면 영원히 시정할 수 없습니다. (172-32)
하나님은 우주의 제일 원인이시며 삼라만상의 창조주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하는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특별한 뜻을 이루시기 위해 만물을 창조하였으며, 그 목적은 바로 사랑의 구현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참사랑의 근원이시지만, 아무리 전능한 하나님이실지라도 혼자서는 결코 사랑의 기쁨을 느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대상이 필요하며 그 대상으로부터 자발적인 사랑을 돌려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 대상으로서 최고의 피조물이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인간의 삶에는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은 성숙하여 하나님과 영원한 참사랑의 관계를 실현하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평화를 이루는 근본원리인 것입니다. (166-131)
잘사는 것도 중요하고 무엇인가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먼저는 종적인 하늘 부모 앞에 효의 도리를 해야 됩니다. 종적인 하늘 부모 앞에 충의 도리를 해야 됩니다. 종적인 하늘부모 앞에 성인 이상의 도리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이 태어난 본래의 목적입니다. 또, 그러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을 지은 것입니다. 그런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58-231)
인생이 참되게 갈 길이 어디냐? 인간이 어디서 태어났느냐? 사랑에서 태어났고, 인생이 어떤 길을 가야 되느냐? 사랑의 길을 가야 되고, 어떻게 죽어야 되느냐? 사랑을 위해서 죽어야 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이냐? 대우주가 환영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소우주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공인하고, 천사세계가 공인하고, 만물이 공인하고, 모든 사람이 공인하고, 우리 부모가 공인할 수 있는 대우주 가운데서 태어나고 그 가운데서 살아가고, 그 가운데서 사랑하고, 그 가운데서 죽어가는 것이 인생이 태어난 목적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83-164)
사람은 자기가 좋을 때는 부모 형제 친척을 찾아 함께 즐기고자 합니다. 좋은 것은 행복한 것입니다. 행복은 영원한 것이요, 영원한 것은 심정입니다. 우주의 중심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부모와 자식입니다. 즉 부모와 나입니다. 하나님과 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 나는 아들입니다. 인생의 궁극적 목적은 아버지를 찾아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12-104)
선생님이 언젠가 길을 가다가 나이 많은 할아버지와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할아버지께 '어디 가십니까?'라고 물었더니 '가긴 어딜 가. 내 아들네 집에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요, 가시면 무엇을 하십니까?'하고 다시 물으니 '주는 밥을 먹고 어쩌다 닭 잡아주면 닭도 맛있게 먹지.'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또, '그러면 먹고 나서 무엇을 하십니까?' 하고 물으니 '먹고 나면 별거 없지.' 이런 식의 대답이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이렇게 보내서야 되겠습니까? (119-289)
가게의 장부를 정리할 때에도 수입이 얼마이고, 지출이 얼마인지를 정확히 결산을 합니다. 이렇게 장부를 정리하는 데에도 수지결산을 철저히 하는데 여러분의 인생은 어떠합니까? 일생 동안 산 것을 수지결산 해 보았습니까? 적자입니까, 흑자입니까? 적자라면 땅을 치고 통곡해야 합니다.
사람은 죽는 자리에서 즐겁게 노래를 부르며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죽음 앞에서 살려고 허덕이는 것은 적자 인생이라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절대성을 중심삼고 심정의 세계에 있어서 흑자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19-289)
인간은 누구를 위해 사느냐? '나를 위해 살지.'하면 그것은 낙방입니다. 자기를 위해 산다는 사람 앞에 가정이 있을 수 있어요? 소망의 가정이 없는 것입니다. 나라가 있을 수 있어요? 나라는 안 나옵니다. 거기에 세계가 있을 수 있어요? 세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세계가 나올 수 있는 자리가 없습니다. 천지의 공약은 '이 개인주의 악당이여 물러가라!' 하고 제지하는 것입니다. 개인을 위주하는데 거기에 가정이 들어갈 수 있어요? 거기에 어떤 이상적인 나라가 들어갈 수 있어요? 송곳 끝같이 좁은 데를 들어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57-66)
여러분은 사랑을 알아야 됩니다. 모든 것이 이동하는 목적, 존재하는 목적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찾아서 움직이고, 사랑을 찾아서 존재하고 있다는 이 철칙을 여러분은 언제나 갖고 있어야 됩니다. 새들이 서로 좋아하고 짹짹거리며 날아다니는 것도 사랑 때문이며, 지남철의 플러스 마이너스가 서로 합하는 것도 사랑으로 하나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이 전부 다 누구를 만나고 하는 것도 하나되기 위해서입니다. (67-159)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사람이 어디로부터, 왜 태어났으며 어떻게 살아가야 되느냐? 간단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나님 중심한) 때문에, 사랑으로 말미암아 태어났으니 사랑의 길을 찾아서 사랑의 목적지로 가는 것입니다. 이러면 순환법 도상에서 영원히 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영원한 개념이기 때문에 사랑을 찾아서 이 중심에 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에서만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125-65)
내가 일생동안 사는 것은 나 때문에 사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그 목적 때문에 이동하고 살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얼마나 멋져요? 그렇게 사는 사람은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힘드는 일이 있고, 눈물이 있고, 혹은 비참함이 있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비참이 아니요, 비통이 아니요, 슬픔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원칙을 알아야 합니다. (67-159)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사느냐? 절대적인 참사랑, 참사랑을 위해서 살자! 여기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지갑에 있는 손수건도 사랑을 위해서 있다, 내가 일하는 것도, 땀을 흘리는 것도 사랑을 위해, 참사랑을 위해서 한다 이겁니다. 내가 말하는 것도 참사랑을 위하고, 먹는 것도 참사랑을 위하고, 노는 것도 참사랑을 위하고, 전부 다 그러는 것입니다. (107-205)
인간은 무엇을 목적으로 해야 되느냐? 개인을 목적으로 하는 것보다, 가정을 목적으로 하는 것보다, 단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보다, 국가를 목적으로 하는 것보다, 세계를 목적으로 하는 것보다, 하늘땅을 목적으로 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님과 인간이 합한 목적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목적이 최후에 남을 것인가? 개인을 위주하는 것은 흘러가는 것이요, 가정을 위주하는 것도 흘러가는 것이요, 단체를 위주하는 것도 흘러가는 것이요, 나라를 위주하는 것도 흘러가는 것이요, 세계를 위주하는 것도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맨 나중까지 남을 하나의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신(神)과 인간(人間)이 합동해서 추구하는 목적입니다. 그런 목적만이 인간 역사의 최후에까지 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41-323)
여러분의 마음이 최후에 안착할 수 있는 종착점이 어디냐? 하나님을 찾아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다 해도 거기에 여러분의 마음은 안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최후의 종착점은 하나님을 점령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점령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점령하지 못하면 만사가 허사입니다. (24-17)
인생의 최후의 목적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늘의 중심이 되는 그분과 만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분과 같이 사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분과 만나는데 어떤 자리에서 만나느냐, 사는데 어떤 자리에서 사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분과는 중심의 자리에서 만나고 중심의 자리에서 살자는 것인데, 그 중심의 자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의 양심이 지향하는 최고의 목표는 천운을 따라가서 하나님과 일치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내 것으로 하자는 것입니다. 결론은 그것입니다. (24-17)
인간이 최후에 도달하고 싶은 것은 최고 되시는 분의 사랑의 대상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최고의 분이 누구냐 하면 우리 아버지인 동시에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65-46)
본래 인간의 특권은 누구를 막론하고 천상왕국세계에 있어서 황태자로 태어날 수 있는 권위를 가진 것입니다. 공주로 태어날 수 있는 권위를 가진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가치입니다. 그것이 본래 인간의 권위였습니다. (68-326)
심정을 통하게 되면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문화의 배경이나 역사적인 환경, 혹은 시대의 위치 여하에 따라 인간의 가치가 좌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어떠한 것들로도 인간의 가치를 결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늘을 알고, 땅을 알고, 하늘의 목적과 땅의 목적과 인간의 목적을 아는 데에 있어서만이 인간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15-83)
우리는 새로운 가치관을 모색해서 그것을 중심삼아야 됩니다. 세계에 대한 새로운 가치, 인간에 대한 새로운 가치, 이념에 대한 새로운 가치 혹은 사랑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모색해야 합니다. 그 가치관이 신의 뜻과 일치될 수 있는 내용을 가지고 출발하게 될 때, 그 가치관은 인간을 중심삼은 가치관과는 모체가 다른 것입니다. 인간의 뜻을 중심삼고 세워져 있는 가치관과 다른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계에 있어서 확실한 가치관을 가져야 됩니다. 세계관을 넘어설 수 있는 가치관을 가져야 됩니다. 우리 통일교회는 그 가치관의 중심을 하나님에게 두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장은 세계로 돌아가자, 이상세계로 돌아가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이상세계도 없는 것이요, 행복의 세계도 없는 것이요, 영원한 세계도 없는 것이요, 사랑의 세계도 없는 것입니다. 그 모든 행복의 요인, 우리가 소망하는 모든 요건들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리워하고, 이것을 찾아 나온 것이 인류 역사상에 나타난 종교라는 기관이다 하는 것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68-138)
우리 통일교회는 절대적인 가치관을 제시함과 더불어 참부모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소망하는 절대적인 가치의 그 기준이 어디가 종착점이냐? 참부모의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지닐 수 있고, 영원한 사랑을 지닐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아담과 해와가 타락하게 될 때, 하나님이 허락한 자리에서 상대이상을 묶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 멋대로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해서 관계를 갖고 출발할 수 있는 것은 부자의 인연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깨졌으니, 몰락되었으니 그것을 표준하여 다시 꿰매지 않으면 안 됩니다. (68-138)
① 인간의 가치는 하나님적 가치
사람의 가치가 얼마나 크냐? 하나님이 지팡이를 짚고 천년만년 그리워할 수 있는 존재가 사람입니다. 통일교회 문선생이 보니까 요것이 우주의 근본이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팎 관계가 됐으니 종횡의 사랑의 세계관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상하관계와 좌우관계가 되니까 종횡의 사랑의 세계관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 중심에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마음의 깊은 골짜기의 자리에 하나로써 단단히 묶어줄 수 있는 그 자리는 종횡의 중심 자리입니다. 요걸 묶어 놓지 않으면 종횡의 기준이 사랑의 이상형으로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종적인 것이 아무리 있다 하더라도 횡적인 것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이렇게 지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48-224)
하나님은 절대적인 창조의 관을 소유한 절대자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대상 가치의 존재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땅 위의 피조만물 가운데 그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가치로 보면, 상대적 존재란 하나님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존재입니다. '상대적 가치'란 말이 좀 어려운 말이지만, 상대적 가치라는 것은, 상대라는 말을 중심삼고 그 대상의 가치라는 것은 하나님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줘 봐야 하나님 혼자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남아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을 투입하고 하나님 자신의 힘을,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입니다. 소모전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대상의 가치적 존재로 지은 것이 인간입니다. 이와 같이 절대적인 가치의 존재가 인간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그런 관을 두고 가치적인 존재로 인간을 지으신 것입니다. (68-134)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 때문에 지었습니다. 인간은 왜 지음 받았느냐? 사랑 때문에 지음 받았습니다. 인간이 만물과 다른 것은 하나님의 아들딸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직계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대상자로 지음 받았다 이겁니다. 이게 인간의 특권입니다. (132-245)
사람이 누구를 닮았느냐?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사랑을 원하는 것도 결국은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을 중심삼은 이상의 창조세계라는 것은 실체를 중심삼은 사랑의 표시가 형상으로 나타나고, 형상의 표시가 상징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원리에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무엇을 중심삼고? 사랑을 중심삼고. 그 실체가 기뻐하면 그 형상되는 것도 자동적으로 기뻐하고, 형상되는 존재가 기뻐하면 상징적인 것도 자동적으로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작용을 무엇이 하느냐? 사랑만이 한다는 것입니다. (166-36)
하나님이 사랑을 찾아가는 대상을 만들려고 할 때 누구를 닮게 만들겠어요? 하나님 닮게 만들어요? 그 하나님을 닮게 만든다면, 하나님 가운데에 있는 것처럼 남자 성품이 있어야 되고 여자 성품이 있어야 됩니다. 자기를 닮았는데 자기 본성상에서부터 전부 다 빼내가지고 보이지 않는 성상, 보이지 않는 생각의 형태를 실체로 전개시킨 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했다는 말이 맞다는 것입니다. (170-140)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의 모든 체(體)에 상징적으로 다 투입했다는 것입니다. 눈은 누구를 닮았다구요? 하나님. 그렇기 때문에 얼굴 가운데서 보게 되면 눈은 깊은 데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모든 걸 관찰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코는 아담과 해와를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중심입니다. 그 다음에 입은 만물입니다. 횡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팔 삼십이(4×8=32), 서른 두 개의 이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만물을 중심삼고 4수를 중심삼고, 그 다음에 귀는 사방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이 목 위는 하늘나라입니다. 하늘나라의 정보처가 있는 것이다 이겁니다. (201-83)
얼굴은 천지창조의 주인이 자기의 형상을 다 집어넣어 만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 가운데는 하나님의 성품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이 눈은 뭘 상징하느냐 하면,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생물이 생겨날 때 눈이 먼저 생겨나는 것입니다. 천지의 중심은 하나님이시기에 눈은 하나님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어떤 사람이든 그 사람의 눈은 하나님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비록 어떤 사람이든 그 사람의 눈을 보면 그 사람이 양심적인 사람인지, 비양심적인 사람인지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39-220)
아무리 진리라 해도 진리의 핵심이 뭐냐? 돈도 아니요, 권력도 아니요, 지식도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본질적 사랑은 종적인 곳에 있는 것이요, 진리적 사랑은 횡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물을 보아 하나님을 알지니,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의 형상이니 아담과 해와를 보아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해와는 종적인 참의 사랑의 대상적 주체이기 때문에, 이들 둘, 남자 여자의 사랑을 동서남북을 통해서 세계의 축을 갖다 맞추게 될 때는 하나님과 영계가 통하고 만세계가 다 통한다는 것입니다. (179-258)
여러분은 주체와 하나되어야 되고 대상과 하나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체와 대상이 하나되면 번식이 벌어집니다. 주고받으면 반드시 번식이 벌어집니다. 그 번식될 수 있는 자리는 기쁜 자리인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도 성상과 형상의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지요? 각자일 때는 주체가 아닙니다. 남자와 여자가 합해야 가정의 주체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둘이 합하면 주체가 되지 않으려 해도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42-88)
인간들 스스로 하나님의 본연의 사랑을 재현시킬 수 있는 운동,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운동,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는 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 몸과 마음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그것이 첫째 되는 계명이다 이겁니다. 사랑하는 것이 첫째입니다. 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중간이면 안 됩니다. 끝에 가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날 수 있는 진정한 마음, 하나님과 하나되겠다는 그 마음의 본성이 절대적이요, 그것으로서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이라고 할 수 있는 경지에 들어가야 됩니다. 그렇게 사랑하라고 하는 것이 첫째되는 계명입니다. (149-213)
하나님과 인간이 박자가 맞아서 화동할 수 있는 기쁨의 박자 앞에 모든 것이 자기 모양대로 음률을 맞출 수 있고, 자기 모양대로 전부 다 상징적으로 형상적으로 춤을 추고 다 이럴 수 있는 그런 기쁨의 표시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만물도 '아하, 내가 태어난 보람이 있구나!'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하나님과 인간이 사랑의 잔치를 하는 잔칫날에 동참할 수 있는 인연을 가지고 그 기쁨을 서로 나눌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이 피조세계의 지극히 작은 만물이 바랄 수 있는 소원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166-36)
이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아들딸을 지을 수 있는 토대라는 것입니다. 관계되고 연결될 수 있는 토대라는 것입니다. 동물도 그렇고 광물도 그렇습니다. 광물세계도 플러스 마이너스가 있습니다. 식물세계도 암술 수술이 있고, 동물세계도 암놈 수놈이 있습니다. 전부 다리를 놓아 가지고 모든 것이 결집되어 창조된 최고의 걸작품이 인간의 내적 형상과 외적 형상입니다. (144-231)
그러면 하나님이 왜 밤과 낮을 지었느냐? 매일같이 해가 있으면 아침이 무슨 자극이 있어요? 광명한 아침이다, 빛나는 아침이다 할 때 광명하기는 뭐가 광명하고 빛나기는 뭐가 빛나요? 재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자극을 위해서, 사랑이라는 과제를 놓고 자극적인 상징과 형상으로 엮어지면서 조화될 수 있는 박자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124-80)
여러분의 생명의 뿌리가 어디에 있느냐? 타락하지 않은 부모에게 있습니다. 그럼 타락하지 않은 선한 부모의 자리는 어떤 자리냐? 하나님께서 이성성상의 주체이신 만큼 하나님께서 자기의 이성성상을 전개하여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우주를 짓고 인간을 지은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남성적 성품을 전개시킨 것이요, 해와는 하나님의 여성적 성품을 전개시킨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일반 사람들은 보통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한 분이니까 그렇게 말하겠지만, 그 한 분이라는 개념 가운데는 '하나님 아버지, 어머니'라는 개념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140-121)
만일에 인간조상 아담과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 것이냐?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과 한몸이 되어, 하나님과 같은 자리에 서서, 하나님의 창조의 위업을 이어받아 하나님이 창조 후 기뻐하셨던 것과 마찬가지의 자리에 서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그런 관계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사람은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54-56)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의 아들딸인 동시에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이들이 다 장성하여 성전이 완숙하게 지어지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해와 속에 들어와 계시겠다는 겁니다. 그래 가지고 다 장성한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을 중심삼고 성례식을 올리면 하나님과 한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적인 하나님이 되고 우리 인간은 실체를 쓴 하나님의 몸이 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을 보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믿어서 구원받는 사람도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데, 본연의 인류의 참된 조상의 자리에 나아가는 그분들이야 두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54-131)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고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더라도 아버지는 위에 있고 아들은 아래에 있는 상하관계와 같은 그런 기분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 인간은 어떤 생각을 하느냐? '아버지, 아버지가 앉으신 그 자리를 나에게 한번 주세요. 나도 아버지의 자리에 앉고 싶어요!' 하는 욕망이 우리 인간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네 이놈, 안 된다!' 하게 되면 다 깨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그런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서 그래라, 어서 그래라!' 하시면서 그 자리까지도 우리 인간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 자리까지 인간에게 주고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임재하시어 우리의 마음을 성전으로 삼고 계시겠다는 것입니다. (54-81)
성경에는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무슨 말입니까? 해석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건 위대한 말입니다. 제아무리 큰 하나님이라 해도 그 하나님과 내가 사랑을 속삭일 수 있는 사랑의 대상권이 되면, 그 사랑의 대상권과 하나되면 우주를 상속받을 수 있는 권한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라는 원칙기반을 통해서 하나님이 지은 세계, 영계?무형세계?실체세계, 이 전부, 즉 우주의 상속권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137-47)
아담은 실체를 쓴 하나님의 몸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있지요? 너희들의 몸이 성전이 되는 것을 모르느냐고 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우리 마음에 본연의 사랑이 싹트는 그 자리를 지성소로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마음에 하나님이 우주적인 사랑의 성전을 짓고 사랑의 힘을 뻗어 가지고 사랑의 꽃을 피우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를 지어 가정과 세계에 번식하라고 축복해 준 목적이다 하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121-62)
제일 거룩한 곳이 어디냐? 지성소가 어디냐 할 땐 예루살렘의 성전이 지성소가 아닙니다. 인간이 지은 그곳이 지성소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사랑이 거할 수 있는 곳이 최고의 지성소입니다. 이 지성소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죄가 얼마나 큽니까? (136-198)
하나님이 인간을 지은 것은 실체 하나님의 몸으로 지은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을 보더라도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하고 말했습니다. 성전이 뭐예요?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입니다. 아담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의 몸이요, 해와가 누구냐 하면 하나님의 부인이었다 이겁니다. 이렇게 됐더라면 그 자식은 하나님의 핏줄을 갖고 태어납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혈족이 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135-266)
완성단계에 이른 인간이 영계에 가면 어떻게 되느냐? 아담은 하나님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과 고린도전서에 '너희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된 것을 알지 못하느냐?' 하고 나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임재할 수 있는 성전이요, 집입니다. 하나님과 어떻게 닮아지느냐? 책임분담 완성단계에 이르러 하나님이 임하여 하나되게 되면, 사랑으로 말미암아 모든 생명의 결탁, 일체성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생명이 동화되는 것입니다. 남자 여자가 가정, 부부를 이룬다는 것은 사랑을 중심삼고 일체, 동화된다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 사랑의 힘은 하나님과 동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130-17)
인간이 완성하여 성년이 되면 그때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들어와서 사랑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좋아함과 동시에 아담이 좋아하는 격동적인 사랑을 하나님이 할 수 있다 이겁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최고의 신성한 성전입니다. 거룩할 성(聖)자입니다. 그래서 참사랑 가운데는 어디나 하나님이 들어가 계신다는 것입니다.
왜 사람이 참사랑을 좋아하느냐? 참사랑만 만나면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과 해와가 성년이 되어 사랑할 때 아담과 해와의 몸은 이 우주를 창조한 하나님이 그 속에 들어와서 최고의 신성한 성전을 이루는 거룩한 곳이 되는 것입니다. (128-317)
해와가 누구냐 하면 아담의 아내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실체입니다. 네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마음에 임재해 있는 보이지 않는 아버지입니다. 이 두 아버지가 하나되는 겁니다. 합일(合一)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영적 세계, 무형의 세계와 유형의 세계의 합일의 기점이 아담의 본성적 기준입니다. 그 본성적 기준은 무엇이냐? 돈보따리, 욕심보따리가 아닙니다. 순수한 사춘기를 통해서 모든 세포 기능이 총동원돼 가지고 하나의 촉각으로, 안테나로 나타난 그 기준을 중심삼고 하나님이 거기에 임함으로써 자리를 잡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을 보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하는 말이 있지요?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여러분이 신비스러운 경지에 들어가서 기도하면서, '하나님, 어디 있소? 하면 답변이 참 멋있습니다. '여기 있다! 왜 그렇게 야단이야.' 그런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밥을 못 먹었나? 밤에 왜 이렇게 야단이야?' 하신다는 겁니다. '어디 있어요?' 하고 물으면 '어디 있긴 어디 있어? 저 깊은 마음 뒷면에 서 있지! 네 마음속에 있지!' 하신다는 것입니다. 천국이 어디 있다고 했어요? 마음속에 있습니다. (224-194)
① 마음에 동화된 생활을 해야
자기의 제일 가까운 선생이 누구냐 하면 자기 마음입니다. 제일 친한 친구보다도 귀한 것이 자기 마음이고, 어머니 아버지보다도 더 귀한 것이 자기 마음입니다. 마음한테 물어 보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는 하나님이 들어와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됩니다. 그 자리까지 들어가야 됩니다. 불교로 말하면 자성을 맑혀야 된다는 말입니다. 석가모니가 말한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란 내가 나한테 물어보면 나에게 하나님이 들어와 있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못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133-178)
사랑하는 마음은 언제나 희생하려고 합니다. 양보하려고 합니다. 주고도 또 주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내가 돈이 100억이 있어 길가에 나가서 전부 다 나눠주었다 해도 세계 인류를 못 도와주었기 때문에 돈이 더 있으면 더 나눠주고 싶기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다는 것입니다.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측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자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일을 했더라도 마음한테 물으면 '더해야 되지!' 이렇게 답변한다는 것입니다. (133-180)
자기 마음을 맑혀야 됩니다. 마음을 맑혀야 됩니다. 마음이 선생보다 나은 것입니다. 마음은 영원한 내 주인입니다.
그러므로 사(邪)된 마음을 가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공리에 속한, 공적 자리에 선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133-178)
어떤 사람을 척 보면 그 사람이 어떻다는 걸 마음은 대번에 압니다. 벌써 그걸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일 가까운 선생이 자기 마음입니다. 그러니 그 마음을 괴롭게 하지 말라 이겁니다. 마음을 슬프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생님을 슬프게 하는 것이요, 천주의 주인을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내 일생의 주인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슬프게 하는 건 내 일생의 주인을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기뻐할 수 있는 길을 가야 됩니다. (133-180)
마음하고 즐기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으로 보게 되면 외로운 자리 같지만 마음하고 친구 되는 시간입니다. 마음하고 앉아서 명상이라도 해보라는 것입니다. 깊은 기도의 자리로 들어갑니다. 남모르는 깊은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필요합니다. (133-180)
통일교회에서는 심신일체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무엇으로 일체화시키느냐 하면 바로 참사랑을 중심삼고 하나 만든다는 것입니다. 관념과 실제에 대한 문제도 들어가 보면 여러 가지 배후가 있습니다. 그것을 해명해 들어가면 바로 이 길이 정당한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건 체휼해 보면 증명되는 것입니다. (227-7)
양심이 바르다, 행동이 바르다, 심신일체권을 이루고 있다 할 때, 그것은 무엇을 중심삼고 하는 말이냐? 말만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행동만 가지고도 안 됩니다. 심신일체권의 결착점은 어디냐? '우선 90도가 되라. 90도가 되는 데는 모든 세상 가운데 수평으로서 중심이 될 수 있는 기준을 세워라. 서양에 가더라도, 동양에 가더라도 연결될 수 있는 표준적인 인간이 되어라. 그래서 역사적으로 현재와 미래를 통해서 보더라도 그것은 틀림없다고 할 수 있는 기준이 되어야 된다.' 이게 결론입니다. (205-27)
인간의 귀중한 가치를 만점으로 만드는 것은 참사랑과 일체가 될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심신일체는 양심과 육신이 공명권에 서 있는 것을 말합니다. 소리굽쇠의 주파수가 같을 때, 하나를 땡 치면 그 반대의 소리굽쇠가 울립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참사랑으로 양심을 치면 육신이 울리는 것입니다. 참사랑으로 육신을 땡 치면 양심이 공명권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교육이 필요 없습니다. 그 한가운데 들어가면 가르쳐야 될 모든 것을 알게 되어 있습니다. (223-342)
통일교회의 용사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심신일체권(心身一體圈)을 이루어야 됩니다. 이 생애 동안에 심신일체권을 어떻게 이루느냐? 그것을 이루지 못하는 자가 사랑을 생각하고 이상을 생각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천운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완성한 자기 자신을 지향하는 거기에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연결되는 것이지, 그냥 그대로의 기준에 있어서는 새로운 희망의 천국에 연결되는 길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205-27)
심신일체를 어떻게 이루느냐? 역사를 통해서 심신이 분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셨다고 하면, 그런 하나님은 인간의 적입니다. 자기가 그런 입장에 있는 것을 확실히 알아 가지고, 하나님께 '하나님 자체의 마음과 몸이 인간 같이 싸웁니까?'라고 물어 보면, 하나님이 어떻게 대답할까요? 그런 것을 생각해 본 사람 있어요? 하나님도 인간과 같이 양심과 육신이, 심신 일체되지 않고 싸우고 있느냐고 물어 보면, 하나님은 틀림없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십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경지에 도달한 적이 없으니까 모를지 모르지만, 통일교회 교주로서는 그런 경지를 언제든지 연결할 수 있는 길이 있으니까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심신일체가 되어 있습니다. (223-342)
종교생활은 몸을 주관하는 것입니다. 3년 내지 5년 이내에 습관성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고 불편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할 때는 심신일체를 아무리 바라도 길이 없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제1 목표는 '우주주관 바라기 전에 자아주관 완성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통일권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 아무리 세계를 뛰어다녔다 하더라도 자기와 관계를 가질 길은 절대 없는 것입니다. (222-328)
인간의 몸은 사탄의 혈통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양심은 아담과 해와가 장성기 완성급에 성장할 때까지 있었던 하나님의 양심의 기준까지 성장해야 됩니다. 그건 신념입니다. 그것과 반대되는 사랑의 힘에 의해, 이 양심 이상의 힘으로 인해 사탄에게 속아 버렸습니다. 양심도 육신의 방향에 따라야 했던 것입니다. 양심 쪽에 더 힘을 줘야 됩니다.
훨씬 더 많은 힘을 주게 되면, 육신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따라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양심이 육신보다 약하면 현재의 상태보다 더 밑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이 두 가지 길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금식이라든가 냉수 목욕을 하고 희생과 봉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 외의 길은 없습니다. 여러분들 그래요? 이 길 가고 있어요? 죽더라도 희생과 봉사를 하겠다고 맹세합니까? 그래서 죽을 각오를 하고 반대의 길을 가야 되는 것입니다. 종교의 갈 길, 그것은 굴복의 길입니다. 심신이 싸우는 그 이상의 굴복의 길입니다. 그 길을 가지 않고는 심신일체를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222-328)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오래됐다고 해서 죄를 묻어 두면 안 됩니다. 그것을 청산지어야 됩니다. 수속을 밟아 청산해야 됩니다. 내 생애의 모든 것을 백지화시켜서, 거기에서 새로이 부활되어 에덴동산에서 죄 짓지 않고, 하나님이 만들어 놓았던 몸 마음이 완전히 참사랑과 하나될 수 있는 본연적인 나라고 자각할 수 있는 남성 여성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느니라! 알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고향에 못 갑니다.
여러분은 고향집을 찾아가야 됩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본연적 부모가 계시고, 본연의 우리 집이 있고, 황족권 생활을 중심삼고 만국을 처리할 수 있는 장자권 국가의 후손들이 살아야 할 곳이니, 그곳이 새로운 내 고향집입니다. 자기가 난 그 고향이 아니라 새로운 내 고향집, 본연의 집을 찾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 고향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추어야 됩니다. 그러려면 내 자신이 심신일체가 돼 가지고 통일권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233-127)
암만 잘못했더라도 '하나님, 나 이렇게 잘못했어요!' 이렇게 솔직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본연의 마음이 이렇고, 애비의 마음이 이렇고, 스승의 마음이 이렇고, 나라의 백성의 마음이 이렇게 되어야 할 것이 아니오? 이러한 마음을 하나님의 사랑과 연결시키려고 충효하는 내 마음이 변치 않을 것이오. 그런 마음을 긍휼히 보시사 오늘 되어진 그 마음 앞에 모든 것을 용서해 줄 수 있겠지요?' 이러면 하나님이 '음음'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방법도 알아야 됩니다. 아시겠어요? (149-9)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이 사시는 곳은 도대체 어디겠어요? 하나님은 가장 가치 있는 사랑에 정착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남자 여자의 두 사람이라고 하면, 하나님은 어디에 있겠어요? 하나님은 일체화되고 변하지 않는, 통일된 사랑의 가장 밑바닥에 수직으로 살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뭔가 하면 남자 여자가 하나된, 그게 중심점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신비한 기도의 경계, 영적 체험권에 들어가서 '하나님!' 하면 뱃속에서 '왜 부르느냐? 여기 있다, 여기!'라고 대답합니다. '여기'라는 것은 자기의 마음 가운데입니다. 심신일체가 된 사랑의 중심점, 수직의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점을 수직이라고 보면, 이것은 영점이라는 것입니다. (224-124)
심신일체가 되면 우주의 힘이 보호해 주는 것입니다. 우주의 힘이 보호해 주는 몸 마음이 되면 부모도 우주의 인연을 가진 부모, 형제도 그런 인연을 가진 형제입니다. 모두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민족, 나라가 인연을 맺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멋진 결론입니다. 그래서 나라를 넘어서 다른 나라에 가더라도 그런 일체권을 이루게 되면 거기서도 통합니다. 어디에도 통하는 것입니다. 축구를 할 때 볼이 굴러가다가 멈추면 어떻게 돼요? 그 표면 전체가 합할 수 있는 데는 수직선을 통합니다. 그래서 구형체를 이상적인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표면의 어떤 곳에서도 그 수직선이 안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굴러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신일체권, 90각도가 되면 어디든지 다 맞습니다. 서양사람과 동양사람, 과거의 사람과 현재의 사람, 미래의 사람 할 것 없이 어디든지 다 맞는 것입니다. (205-27)
마음은 누구냐? 내 주인입니다. 내 선생입니다. 마음은 누구냐 할 때, 마음을 닮은 몸뚱이를 낳았으니 내 몸뚱이의 근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면적으로 어머니 아버지 대신입니다. 마음은 부모 대신이요, 스승 대신이요, 그 다음에는 주인 대신입니다. (222-142)
여러분의 마음은 스승이 필요 없습니다. 마음은 제2의 하나님입니다. 스승을 따라가지 말고, 통일교회 선생님을 모시지 말고 여러분의 마음을 모시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어때요? 새벽에 일어나 가지고 혼자인데, 쥐새끼 소리도 안 들리고 파리 소리도 안 들리고 조용한데,'아이구, 나 요런 것을 좀 해야 되겠다. 좋은 일을 해야 되겠다.'고 하면 마음이 '좋아! 좋아! 어서 해라! 하지만, 나쁜 생각하면 마음이 '이놈!'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알아요, 몰라요? 알지요. 그렇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잘 아는 것입니다. (138-70)
마음의 가치, 내게서 마음이 얼마나 비싼 것인가를 생각해 봤느냐는 것입니다. 마음은 몸뚱이가 잘못된 곳에 가려고 하면 언제든지 충고를 하고 이러면 안 된다고 다 제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몸뚱이는 언제나 마음을 공격하고 무시하고 밟아치우고 제멋대로라는 것입니다. 핍박을 당하면서라도 죽을 때까지 나에게 있어서의 전우와 같이, 스승과 같이 주체적 사명을 감당하기에 희생을 치러 나가는 것이 우리의 몸에 달려 있는 마음이라는 것을 생각해 봤느냐 하는 것입니다. (217-88)
인간의 주인은 바로 자신의 양심입니다. 이 양심이 얼마나 여러분을 위해서 충고를 했으며, 밤이나 낮이나 나쁜 생각을 할 때는 '야 이놈!'하고 지치지 않고 끌고 고개를 넘고 강을 건너려고 얼마나 안달했습니까? 이처럼 마음은 참된 주인의 모습을 지니고 나를 보호하려는 데도 배반한 몸뚱이, 하나밖에 없는 우주로부터 귀한 스승으로 점지하여 받은 선생님인데도 불구하고 이 선생님을 여지없이 천대한 이 몸뚱이, 또 내 본연의 사랑의 마음을 이어줄 수 있게 한 부모 대신 보내 준 양심을 여지없이 유린한 이 몸뚱이, 이렇게 마음의 원수가 된 이 몸뚱이를 여러분은 사랑합니까? 아닙니다! (201-339)
이제 우리가 누구의 말을 들을 때는 지나갔습니다. 어떤 진리보다도, 천만 배 훌륭한 스승의 말보다도 내 마음의 말을 듣고, 들어도 또 듣고 싶어 그 마음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나도 알 수 없는 무한대의 무엇이 나옵니다. 그것이 창조의 내용입니다. (7-173)
양심이 몸을 위해서 얼마나 희생당했습니다. 일생 동안 유린당하는 양심의 사정을 여러분은 알아요? 밤이나 낮이나 나를 관리하기에 피곤한 것이 양심입니다. 그래도 지치지 않고 몸이 나쁜 행동을 하려 하면 막는 것입니다. '그만큼 했으면 이제 그만두어야 할 것 아니냐. 내 말 좀 들어야 될 것 아니냐?' 고 합니다. 자기 앞에 제일 가까운, 부모 대신 하나님 대신 스승 대신의 존재가 양심입니다. 마음 자체에게는 교육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몸뚱이에게는 교육이 절대 필요합니다. (214-260)
여러분의 몸 마음을 중심삼고 볼 때 마음이 얼마나 불쌍해요? 마음은 하나님 대신입니다. 마음은 열조, 선조들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스승을 대표하고, 마음은 나랏님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이 마음을 얼마나 멸시하고 천대했어요? 우주의 중심으로서 참된 부모의 자리에 있고, 참된 스승의 자리에 있고, 참된 주인의 자리에 있는, 참사랑을 가진 주체로 계시는 분의 대신으로 있는 그 마음이 이 땅 위에 있어서 나 하나를 수습하기 위해 얼마나 희생했어요? 그렇게 희생하면서도 불평해요? 그저 천대받고 끌려다니면서도, 죽은 줄 알았는데 나쁜 생각을 가지고 새벽에 도둑질이라도 하게 되면 '야, 이놈의 자식아!' 하고 또다시 살아서 충고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마음을 얼마나 농락했어요? 마음은 부모 대신이요, 마음은 스승 대신이요, 마음은 주인 대신입니다. 마음세계에는 공판이 필요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 자신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제3자, 증인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209-116)
내 자신에게 위대한 스승이 있는 것을 몰랐습니다. 마음은 위대한 어머니 아버지 대신입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마음을 거슬러 훈시하는 법이 없습니다. 마음이 어머니 아버지와 같이 훈계할 때는 복종할 줄 알아야 됩니다. 이런 모든 질서적 환경에 있어서 기원이 될 수 있는 도의적인 결론이 안 나와 있습니다. 그런 공식이 안 나와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잡아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이중인격을 좋아해요? 마음은 선생 대신, 부모 대신, 하나님 대신입니다. 마음을 가르칠 수 있는 스승이 없습니다. (207-216)
모든 인간은 저마다 자신 속에 가장 소중한 스승을 일생동안 내내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스승을 잘못 대우하고 짓밟고 남용합니다. 그 스승이 바로 인간의 양심입니다. 우리의 양심은 항상 우리 자신에도 도움이 되도록 말을 하며 우리를 참사랑과 연결시켜 주고자 합니다. 부모와 같이 우리의 양심은 우리로 하여금 선하고 비이기적인 사람이 되라고 촉구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도록 인도해 줍니다.
그러나 각자의 마음속에는 또한 양심의 소리에 항상 거역하는 반란자가 있습니다. 그 반란자는 바로 육체인 것입니다. (201-203)
'우주주관 바라기 전에 자아주관 완성하라!' 하는 것이 도의 길을 개척하던 때의 표어였습니다. '우주주관 바라기 전에, 세상만사와 어떤 연관을 갖기 전에 자아주관 완성하라!' 고 그랬습니다. 귀중한 3대 손님입니다. 주인이 될 수 있고, 스승이 될 수 있고, 부모가 될 수 있는 이분을 내 몸이 천년만년 모시고도 부족하다 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때에 비로소 여기에 천운이 임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몸을 위하고 싶어하지만 몸뚱이는 마음을 위하지 않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문제는 내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사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201-137)
이처럼 마음은 참된 주인의 모습을 지니고 나를 보호하려는데도 배반한 이 몸뚱이, 우주로부터 점지해 받은 하나밖에 없는 귀한 스승인 데도 불구하고 이 선생님을 여지없이 천대한 이 몸뚱이, 또 내 본연의 사랑의 마음을 이을 수 있게끔 부모 대신 보내진 양심을 여지없이 유린한 이 몸뚱이입니다. 이렇게 마음의 원수가 된 이 몸뚱이를 여러분은 사랑합니까? 아닙니다. 몸 마음의 싸움을 말리기 전엔 천국이 없는 겁니다. 어느 성인도 이런 것을 생각지 않았습니다. (201-137)
음과 양, 성상과 형상이라는 플러스 마이너스는 상대적이지 상충적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타락한 인간에게는 마음의 소리도 있고 몸의 소리도 있습니다. 마음과 몸이 하나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닮아서 태어나야 할 남자나 여자의 마음과 몸이 어떻게 되어서 갈라졌느냐 이겁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분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에서의 표준상인 몸과 마음이 절대적으로 하나되어 가지고 하나님의 전체 세계에 동화될 수 있고 하나의 중심적인 역할을 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몸과 마음이 어떻게 갈라졌느냐 이겁니다. 몸과 마음이 갈라진 것이 마음대로 되었다면 하나님이 없는 것이고, 이상이니 통일이니 평화니 행복이니 하는 것의 기지를 찾을 수 없습니다. (195-303)
하나님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내 속에 있습니다. 마음이 여러분의 주인이지요? 밤에 그저 나쁜 짓 하려 해도 나타나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고, 언제든지 나타나 주인 노릇하고 어디에서든지 어머니같이, 스승같이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놈의 몸뚱이가 원수입니다. (201-60)
하나님은 누구 닮았다구요? 남자, 여자, 우리 닮았습니다. 여러분 마음이 보이지 않지요? 마음 보고 싶소, 안 보고 싶소?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영적인 입장에서 보게 되면, 하나님도 체(體)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체가 없습니다. 아담 완성이 이루어지지 않아 체가 지금까지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 같은 우주에 마음 같은 주인, 마음 같은 스승, 혹은 관리자, 마음 같은 부모로 있습니다. (197-9)
여러분, 몸과 마음이 하나 안 돼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초점을 맞춰야 됩니다. 기도할 때 몸과 마음이 가책하는 것이 있으면 회개해야 됩니다. 회개할 때는 혼자는 안 됩니다. 동서남북을 갖춰야 됩니다. 자기의 제일 가까운 사람, 부모 앞에 통고해야 됩니다. 스승 앞에 통고해야 됩니다. 그 다음 자기 아들딸한테, 자기 제자한테 통고해야 됩니다. '나에게 이런 이런 일이 있는데 용서받을까?' 이래서 합심해서 후원할 수 있는 이런 길을 가야 됩니다. 그거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184-192)
몸과 마음이 언제 통일될 수 있느냐? 그거 생각 안 했지요? 이거 심각한 문제입니다. 일생동안 몸과 마음이 싸움을 하는데 이 싸움을 말릴 자가 누구냐? 이게 문제입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못 말립니다. 임금도 못 말리고, 스승도 못 말립니다. 성인도 못 말립니다. 이 몸과 마음의 싸움을 말릴 수 있는 주인이 어디 있느뇨? 심각히 찾아봤어요? 그것이 참사랑이라는 겁니다. (184-192)
마음은 여러분의 파수꾼이 되어 가지고 밤이나 낮이나 여러분을 지켜 주고, 여러분을 쉬지 못하게 자꾸 '선한 일을 해라. 선한 일을 해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피로하겠어요? 난 그날부터, 의식을 생각할 수 있고 사회환경에 있어서 모든 제도를 분석할 수 있는 지능적 기원이 생기는 그날부터 일생을 따라다니면서, 자기 스승도 못 따라가고 어머니 아버지도 못 따라 주지만 난 그날부터 죽을 때까지 영원히 양심은 나에 대해서 명령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닮아라, 성인 닮아라, 애국자 닮아라, 효자 닮아라. 그와 마찬가지로 닮기를 바라는 것인데 '몸뚱이 너는 나를 닮아라!' 한다는 것입니다. (179-258)
여러분의 몸과 마음의 통일도 참사랑이 아니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은 몸을 위해서 희생하면서 또 잊어버리고, 또 잊어버리고, 또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마음은 하나님을 대신한 입장이기 때문에 여러분의 스승 중의 스승이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하나님이 당신을 대신해서 파송해 준 내 중심입니다. 종적인 나입니다. (226-7)
5) 참된 인간이 가는 길
① 인간이 찾아가야 할 길
본성의 마음이 가는 길을 가면 우주가 하나로 벌어집니다. 그런 무엇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 자리에 들어가면 자기 마음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서는 마음과 말을 합니다. 뭘 하려고 생각하면 벌써 답변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있는 사람이 자기가 갈 길을 모르겠어요? 벌써 갈 길이 확실해서 우주의 모든 작용의 힘들이 돕는다는 것입니다. 손을 끌고 시험장에 들어가게 되면 벌써 모든 것이 협조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큰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120-327)
위대한 힘의 배경을 갖고 살 수 있는 인간이 참된 인간입니다. 참된 인간은 그렇게 무한한 힘의 백그라운드(background:배경)가 있어 가지고 자기가 지향하는 방향으로 무한히 밀어 준다는 것입니다. 방향이 틀리면 대번에 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통일교회는 껄렁껄렁한 통일교회가 아닙니다. 깊고 높은 배경, 위대한 힘의 백그라운드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노력을 중심삼고 이런 경지를 연결지어서 올라가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면에서 여러분들이 갈 방향감각을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그건 자기가 해야 됩니다. 자기가 제일 잘 안다는 것입니다. (120-327)
자기가 갈 길을 찾아가야 됩니다. 돈만 가지면 다 되느냐? 그게 아닙니다. 돈이 필요할 때가 있고, 또 사람으로서 자기가 가야 할, 다른 길을 가야 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갈 길은 자기가 결정해야 됩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 마음 깊은 속에서 본래 자기가 타고난 본질과 더불어 화합해 가지고 미래의 목적을 지향할 수 있는, 하늘이 있으면 하늘이 그 방향을 제시하게끔 해서 스스로 해결하도록 해야 됩니다. (120-314)
자석은 지구의 인력을 능가한 작용으로 나타나게끔 되어 있는데, 그와 같은 작용은 무엇으로 가능하냐? 지구 중력 이하의 작용으로서 그 작용을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양심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어나면 벌써 자기가 태어난 배경을 딱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판정해야 됩니다. 그러한 것을 감각하고 판정하지 못하면 여러분들이 앞으로 큰 일을 못 한다는 것입니다. (120-302)
우리가 자연을 보고 '아, 나는 4계절 필요 없다. 나는 봄만 필요하지, 여름이나 가을이나 겨울은 싫어!' 하겠지만, 하나님한테 물어 보면 '난 4계절을 다 좋아한다.'고 답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싫더라도 여름을 좋아하는 것을 배워야 되겠고, 가을과 겨울을 좋아하는 것을 배워야 됩니다. 눈이 오는 겨울이 되면, 하나님은 흰눈이 세계적으로 쌓인 걸 볼 때에 좋아하는 것입니다. '아, 나도 좋다!' 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됩니다. (133-29)
하나님 같은 마음으로 자연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홍수가 나고 벼락이 치고 할 때는 '아이구, 저거 나는 싫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허허, 저거 키스하고 결혼하는구만!'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싫다는 사람들한테 '하하하하, 네 이 녀석들아! 못된 녀석들아!' 한다는 겁니다. (133-29)
인간을 사랑해야 됩니다. 인간 가운데에서도 오색인종을 다 사랑해야 됩니다. '어, 나는 백인들만 좋아' 하나님이 그럴까요? 그러면 전부 다 흰옷만 입어야 됩니다. 백인들은 전부 다 흰옷만 입어야 됩니다. 색깔 있는 옷은 전부 다 버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검정 옷은 왜 입어요? 색깔이 있는 옷은 왜 입어요? 그게 모순이라는 것입니다. 방에 들어가면 울긋불긋한 게 다 있는데, 피아노 같은 것도 전부 다 시꺼먼데 왜 갖다 놓았어요? 흑판 같은 것도 왜 갖다 놓았습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밤도 없어야 됩니다. 새카만 밤도 없어야 됩니다. 왜 그래요? 백인 중심이예요? 백인 위주가 뭐예요, 그게? 망할 길입니다. 그게 몇 해나 갈 것 같아요? 얼마나 갈 것 같아요? 겨울이 암만 길더라도 석 달밖에 못 갑니다. 영원한 것을 위해서 여러분은 모든 4계절을 다 좋아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백인만 좋아해서는 안 됩니다. (133-29)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전부를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하고 뿐만 아니라 왔다 간 과거-현재-미래의 인류를 사랑해 주는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옥에 간 영인들끼리 해방해 주는 운동을 하는 하나님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진리의 길을 가야 되고, 생명의 길을 가야 되고, 사랑의 길을 가야 됩니다. 아무리 위대하더라도 위하는 기반이 없으면 모든 것이 따라오지 않습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자연히 주체가 됩니다. 참생명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133-29)
여러분들 자신이 내가 어떤 길을 가야 되는지를 알고 가야 된다 이겁니다. 방향을 딱 정했으면 그걸 중심삼고 있는 정력을 다 투입하는 것입니다. 피곤해 가지고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귀가 듣지 못할 정도로 모든 걸 투입해야 합니다. (120-329)
통일교회에서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면 내가 뭘해야 되는지 벌써 알게 돼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중심삼고 살고 자기 생각을 중심삼고 행동하는 사람은 모릅니다. 배에 있던 쥐새끼도 파도가 심하게 치면 배가 파손될 걸 알고 벌써 줄을 타고 배가 떠나기 전에 다 부둣가로 나갑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걸 모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갈 길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개미도 장마가 질 걸 다 알잖아요? 개미가 행렬을 짓고 이사하는 걸 봤는데 개미들은 다 알더라는 겁니다. 쓸데없는 공상이나 하고 다 그러기 때문에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의 분야를 모른다는 사실은 심각한 것입니다. 심각하게 중요한 일생문제를 하늘과 더불어 타협해야 됩니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 환경적 여건에 적응해야 됩니다. 그걸 누가 해야 돼요? 그것은 어차피 자기가 해야 되는 것입니다. (120-313)
사람은 침착하면 마음 깊은 거기에 마음이 가라앉는 자리가 있습니다. 마음이 잘 수 있는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까지 내 마음이 들어가야 됩니다. 거기서 자고 깨게 될 때에는 예민하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잡생각을 하지 않고 정신을 집중하면 모든 것이 통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양이, 기도가 필요합니다. (120-320)
선생님도 기도합니다. 정성을 들입니다. 언제나 정성을 들여야 됩니다. 정성은 언제 한 번 들여 가지고 써먹는 게 아닙니다. 칼은 언제나 갈아야 됩니다. 칼을 한 번 쓰고 안 갈면 어떻게 되겠어요? 언제나 갈아야 됩니다. 한 번 격해 가지고 화를 냈으면 언제나 갈아 놓아야 됩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조용히 마음의 자리를 잡아 놔야 됩니다. (120-320)
심정의 세계의 중앙에 가면 내려갔다 올라갔다 운동하게 됩니다. 자동적으로 운동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숨을 쉰다는 것입니다. 지구도 숨쉰다는 걸 알아요? 지구도 1미터 가까이 숨을 쉽니다. 이러면서 조정하고 있습니다. 원형으로 구부러진 것을 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정의 세계도 중앙은 전부 다 축을 중심삼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입니다. 운동하는 것입니다. (120-322)
모든 존재물은 타원형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심정의 중심 복판에 들어가 보면, 거기에서 무한한 힘이 전해집니다. 그래서 90각도만 만들면 무한한 힘을 90각도로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도를 닦아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정성을 들여 세상의 모든 면에서 깊은 심령세계를 체험하라는 것입니다. 일생동안 살아가는데 추진력을 무한히 보급 받을 수 있는 하나의 원천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런 놀음을 하는 것입니다. (120-322)
선생님도 선생님 자신이 지금 갖고 있는 힘보다도 더 큰 세계적인 일을 할 때는 심각하게 생각합니다. 더 큰 힘이 필요할 때에는 그걸 어디서 가져오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못 가져올 때에는 그걸 어디서 가져오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못 가져올 때에는 후퇴해야 되는데,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기도가 필요하고, 하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심정의 세계가 그래서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의 세계는 암만 끌어내도 끝이 없습니다. 물질의 세계도 끝이 나고, 지식의 세계도 끝이 나고, 권력의 세계도 전부 다 붕괴될 수 있지만, 심정의 세계는 무한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정의 세계를 중심삼고 움직여야 됩니다. (120-320)
하나님은 독재자가 아닙니다. 하나님도 인간을 위해 투입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 앞에 있는 것은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년만년 하나님을 따라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위하는 천리의 우주의 존재세계 앞에 자기 스스로의 존재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위해서 존재해야 합니다. 위하는 데 있어서 동서양을 통할 수 있고, 고금을 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다 같은 사랑을 갖고 있기 때문에 동양 서양을 극복할 수 있고, 과거-현재-미래를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건 뭐냐 하면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극복할 수 있으니 언제나 발전할 수 있다, 동서양을 극복하니 동서양을 통일할 수 있다 이겁니다. 이건 사랑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187-89)
자기 주장할 때는 자기 파괴, 상대 파괴, 하나님 파괴, 완전히 분리되는 것입니다. 거기서는 통일적 이론을 발굴할 수 없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간단한 말이지만 중요한 말입니다. 우리가 이상을 찾아가는 최후에는, 궁극에 가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종적인 통일을 요구하는데, 그 종적 기준이 어서 오라고 당겨 줄 수 있는 놀음을 하게 하기 위해서는 서로 위해야 됩니다. 위하는 데서 완전히 통일권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187-89)
어떻게 통일이 되느냐? 선생님이 어떻게 통일하느냐? 무엇으로? 주먹으로, 힘으로, 돈으로, 권력으로, 지식으로? 사랑을 중심삼은 위하는 자리에서 만사는 해결되는 것입니다.
결론은 간단하지요? 참사랑을 중심삼고 위해 가는데 있어서 악마의 세계가 하늘나라로 재창조되어 나간다는 결론입니다. 그거 이론적입니다. (133-26)
자기를 위주해 가지고 작용하자는 것은 악을 가져오지만, 전체를 위해 작용하자는 것은 발전을 가져옵니다. 이걸 알아야 됩니다. 전체를 위해서 가는 데는 모든 것이 문을 연다는 것입니다. 개인도 문을 열고, 가정도 문을 열고, 종족도 문을 열고, 민족도 문을 열고, 세계도 문을 열고, 하늘나라도 문을 열고, 사랑의 길이나 모든 길이 문을 열고 환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길이 무엇일 것이냐? 이걸 우리는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서 통일교회는 이러한 관점에서 위해서 가는 길을 취해라, 위해서 살라, 위해 태어났다 하는 천리(天理)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133-16)
참된 인생이 가는 길은 뭐냐? 하나의 공리로 세워야 할 것은 위해서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디서나 통할 수 있는 원칙이니까 만고불변입니다. 과거-현재-미래가 없기 때문에 위해 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공자님이나 예수님이나 석가모니나 마호메트 같은 모든 성자라는 사람 앞에 하나님이 나타나서 '당신들 어떻게 생각하오?'하면, '그게 옳습니다!' 하겠어요, '그게 옳지 않습니다.' 하겠어요? 옳다고 합니다. 그게 우주의 법칙입니다. 그것이 인생살이, 인간이 사는 데 있어서 참된 모습으로 살 수 있는 하나의 법이다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런 참된 길이 있는 것입니다. (133-16)
세계적인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인륜도덕만을 중심삼아 가지고는 안 됩니다. 사람만을 중심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만 중심삼고는 나라를 넘지 못합니다. 나라를 넘을 수 있는 그러한 내용은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천주사상을 갖지 않고는 나라를 초월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들이 무엇을 소개했느냐 하면, 인간만 소개한 것이 아니라 신을 소개했습니다. 성인의 반열에 동참한 사람들을 보면 신을 숭상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신을 빼놓고 성인이 된 사람 있어요? 또, 성인들은 인륜의 도리만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천륜의 도리를 겸하여 가르쳐 준 것입니다. (33-291, 39-316)
가정에서 부모를 위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효자요, 나라를 위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애국자요, 세계를 사랑하는 사람은 성인입니다. 그러면 선생님이 가르치는 것이 뭐예요? 하나님과 세계와 우주를 사랑하는 성자(聖子)가 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이 될 거예요? 성자가 될 거예요, 효자 효녀가 될 거예요? 그러려면 하나님과 같은 사랑을 마음에 가져야 됩니다. (129-99)
하나님은 짧은 생애를 살다 가는 인간 앞에 제일 좋은 표어, 제일 좋은 과제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 과제로서 '누구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라'는 것을 표어로 내세웠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 누구도 되지 못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날에는 성인완성은 물론이요, 충신완성도 물론이요, 효자완성도 물론인 것입니다. 모든 것이 완성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가정에서도 승리한 자리에 서는 것이요, 국가적 기반에서도 승리한 자가 되는 것이요, 세계적 기반에서도 승리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100-157)
통일교회는 무엇을 하자는 것이냐? 위인을 만들자는 것이 아닙니다. 성인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위인 앞에는 원수가 있지만 성인 앞에는 원수가 없습니다. 위인은 자기 민족만 사랑한 사람이지만 성인은 인류를 사랑한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위인이 하나님 앞에 나서게 될 때 '너는 네 민족은 사랑했지만 내가 사랑하는, 내가 찾는 세계인류를 사랑하지 못했지 않느냐'고 하면 나갈 수 없지만, 성인의 도리를 따라간 사람은 하나님 앞으로 직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뭘하자는 거라구요? 위인 만들자는 거예요, 성인 만들자는 거예요? (38-263)
우주를 만든 하나님은, 우주의 법도를 세운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온 우주를 통해서 누구보다도 위해 사는 대표적인 자리에 선 분입니다. 그분이 하나님이다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을 만나려면 위해 살아야 됩니다. 그분은 지식의 대왕이지만 지식 가지고 하나님 앞에 오라고 하지 않습니다. 능력의 대왕이지만 능력 가지고 오라고 하지 않습니다. 권력에 대한, 돈에 대한, 물질에 대한 주인이요 대왕이지만 그것을 가지고 오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위해서 오면 전부가 올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133-16)
우리가 생각하기를, 사랑이니 이상이니 행복이니 평화니 하는 말은 혼자로서는 성립되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반드시 상대적 관계에서 성립되는 말이기 때문에 아무리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계신다 하더라도 그 하나님이 바라는 이상과 행복과 평화는 홀로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상을 성사시킬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을 성사시킬 수 있고, 하나님의 행복과 평화를 완결지을 수 있는 대상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혼자 사랑해서는 무엇하며, 하나님 혼자서 이상해서는 뭣합니까? 반드시 상대적인 인간을 통하지 않고는 이러한 요건을 성사시킬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결론입니다. (75-315)
지혜의 왕이시고 전체의 중심이신 하나님이 참다운 사랑이나, 참다운 이상이나, 참다운 행복이나, 참다운 평화의 기원을 주체와 대상, 이 양자 사이의 어디에 두느냐?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체가 계신 반면 대상이 있는데, 주체를 위하는 길과 대상을 위하는 길, 이 두 길 가운데 이상의 요건을 어디에다 두느냐 하는 것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으로서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참된 이상, 참된 사랑, 참된 평화에 있어서 주체를 중심으로 하고, 대상이 주체를 위하는 데 이상적 기원을 둘 것이냐, 대상을 중심으로 하여 주체가 대상을 위하는 데 이상적 기원을 둘 것이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신 하나님은 그 이상적 기원을 주체 앞에 대상이 위하라고 하는 입장에 세운다면, 하나님이 그러함과 동시에 모든 사람도 자기가 어떠한 대상을 지닐 수 있는 입장에 선다면 그와 같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 될 수 있는 길이 막혀 버립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75-320)
하나 될 수 있고 평화의 기원이 될 수 있는 그 길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 자신뿐만 아니라 참된 인간은 위해서 사는 존재라는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사랑은 위하는 데서부터, 참된 이상도 위하는 데서부터, 참된 평화, 참된 행복도 위하는 자리에서 성립되지, 위하는 자리를 떠나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천지창조의 근본이라는 것을 우리 인간은 몰랐습니다. (75-320)
남자 여자가 태어난 것은, 남자는 남자를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여자를 위해 태어났고, 여자는 여자를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남자를 위해 태어난 것입니다. 태어나기를 자기를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위해서 태어나지 않은데도 자기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나, 나'라는 이 사상을 깨뜨려 버려야 됩니다. 이것만 깨뜨려 버리면 통일의 세계는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61-266)
자기의 가치를 자기에게서 추구하기보다는 상대에게서, 즉 상대적 기준에서 그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길을 탐구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 아닙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심정의 터전은 상대권을 가졌기 때문에 가나 오나 그는 외롭지 않고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59-200)
하나님은 왜 위해서 존재하라는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느냐? 우선 여러분들에게 묻겠는데, 만일 여러분들을 위해서 누군가가 진정으로 생명을 다하고 희생을 다하면서 100퍼센트 은사를 베푼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의 본심이 그 은사를 갚는데 50퍼센트는 주머니에 집어넣고 50퍼센트만 갚고 싶습니까, 아니면 있는 대로 다 갚고 싶습니까? 우리의 본심이 어떻게 작용해요? 누구나 더 갚고 싶어하는 것이 본심입니다.
주는 대로 진정 사랑하는 가운데서 준 것을 안다면 100퍼센트 이상을 돌려보낸다는 것입니다. 100퍼센트가 110퍼센트로 돌아오고 그 110퍼센트 돌아온 것은 또 그쪽에서 진정으로 주었기 때문에 120퍼센트로 갚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여기에서 영원이라는 개념이 설정된다는 것입니다. 영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없으며, 그 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발전과 번창이 생기는 것입니다. (73-326)
이상과 사랑은 인간에게 있어서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인간들은 이런 것이 자기의 것으로 자기에게 나타나는 줄 아는 것, 이것이 큰 오해라는 겁니다. 사랑과 이상은 어디에서 오느냐? 대상에게서 옵니다. 대상에게서 오기 때문에 위하는 법도를 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혜의 왕 되신 하나님은 이런 모든 결과를 아시기 때문에 그런 법도를 세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73-326)
영원이라는 개념, 이것은 자기를 위하는 데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운동하는 것을 보더라도 밀어 주고 끌어 주는 상대적 방향이 크면 클수록 빨리 도는 것입니다. 지혜의 왕 되는 하나님이 위해서 존재하는 법도를 세운 것은 영원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세우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75-322)
우리들 가운데 남에게 주관(主管)받는 것은 죽어도 못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으로 압니다. 더욱이 식자층에 있는 고명한 분에게서 이런 것을 많이 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이제까지의 인간들이 위해서 존재하는 그 앞에 주관받고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영계의 조직을 보면 천지의 대주재 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은 우주 만유의 존재 가운데 위해 존재하는 중심존재이기 때문에 그 분에게 지배받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모릅니다. 천년만년 지배받더라도 감사할 수 있는 이상적 통일권이 여기에 성립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은 위해 존재하라는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75-322)
사랑은 나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생명보다도 귀한 사랑과 이상을 찾으려면 대상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은 이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 고귀한 사랑과 이상을 받을 수 있고, 그것을 찾을 수 있는 존재가 대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겸손히 그 고귀한 사랑과 이상을 받아들이려니 가장 위하는 자리가 아니고는 안 되므로 하나님은 위해 존재하라는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75-322)
사랑은 혼자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나에게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대상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대상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내가 머리를 숙이고 대상을 위해야 되는 것입니다. '위하여 살라!' 고 하는 천리가 여기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지극히 고귀한 것이 나에게로 찾아오는데, 그것을 받으려니 높이고 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하는 철학'을 이루어야 사랑받는 것입니다. (1986. 3. 14)
참사랑은 주고 잊어버리고 또 주는 사랑입니다. 거짓사랑은 주고 보태서 장사하는 사랑이요, 주었으니 너는 그 이상 갚아라, 하는 사랑입니다. 이것은 사탄 사랑입니다. (1986. 1. 21)
우리의 본향(本鄕)은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는 자들만이 들어가는 곳이요, 위해서 나고, 위해서 살고, 위해서 죽어간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이것이 우리 본향(本鄕)의 이상적 구조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본향에 찾아오게 하기 위해서 역사과정에 수많은 종교를 세워 가지고 훈련시켜 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의 종교가 온유 겸손해야 되며 희생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이유는 영계에 돌아가야 할 인간들에게 영계의 법도가 그렇기 때문에 종교가 지상생활 과정에서 그 영계에 알맞도록 훈련시키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차적인 종교일수록 보다 차원 높은 희생을 강조하고 봉사를 강조하게 되는 것은, 평소의 생활을 통해 그 세계에 일치시키려는 데에 그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75-320)
흔히 세상에서 말하기를, 아! 인생이 무엇이냐고 하는데 인생관(人生觀), 국가관(國家觀), 세계관(世界觀)의 확립, 그 다음엔 우주관(宇宙觀)에 대한 확립, 더 나아가서는 신관(神觀)의 확립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확립할 것인가? 계통적 단계와 질서를 어디에다 둘 것이며, 그 차원적 계열(次元的 系列)을 어떻게 연결시킬 것이냐 하는 문제는 가장 심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위해 존재한다는 이 원칙에 입각해서 보게 될 때에 가장 가치 있는 인생관은 내가 전 인류를 위해 있고, 전세계를 위해 있고, 국가를 위해 있고, 사회를 위해 있고, 가정을 위해 있고, 아내를 위해 있고, 자녀를 위해 있다는 입장에서 행복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면, 이 이상의 인생관이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75-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