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우주의 근본 질서
1) 하나님의 이성성상의 대전개
① 하나님은 이성성상의 중화적 본체
㉮ 하나님은 중화적인 사랑의 본체
우주를 관찰해 보면 모두가 양성과 음성의 이성성상(二性性相)이 상대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광물이라는 차원에서부터 시작해서 모든 경우에 적용되고 있습니다. 분자는 양이온과 음이온의 결합을 통해 형성되었고, 식물의 경우 생존과 번식은 암수를 대표하는 암술과 수술의 결합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이성성상은 동물의 경우 더욱 분명합니다. 어류?조류?포유동물 등 모든 동물은 수컷과 암컷으로 존재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최고의 창조물인 우리 인간도 남자와 여자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최초의 남자 아담과, 최초의 여자 이브는 인류의 시조입니다. 이러한 이성성상의 존재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왜 이런 방식으로 창조 하셨을까요? (201-204)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만들어서 뭐하려고 했겠어요? 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여자예요, 남자예요? 여자도 되고 남자도 됩니다. 남자 성품만 가졌다면 여자만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은 그늘에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자도 바라보고 남자도 바라볼 수 있는 두 가지의 성품을 함께 지녔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종적인 자리에서 남자도 좋아하고 여자도 좋아하는 이성성상을 가진 중화적 주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십니다. 남자도 필요하고 여자도 필요해 가지고 어디든지 가서 맞아 언제든지 주체의 자리에 있으니 주체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격위에서는 남성격입니다. 그리고 횡적이란 여성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188-92)
하나님은 한 분일까요, 두 분일까요? 한 분입니다. 한 분인데, 어떻게 두 사람에게 들어가겠어요? 이 사람한테 들어갔다가 저 사람한테 들어가고, 저 사람한테 들어갔다가 이 사람한테 들어가고 그러겠어요? 또 세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수많은 사람들한테 어떻게 들어갔다 나왔다, 나왔다 들어갔다, 그러시겠어요? 이것이 문제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통일교회 원리에서 하나님은 이성성상의 중화체라는 얘기가 나온 것입니다. 여기에는 규칙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성성상으로 계시는 중화적 본체입니다. 이것은 참 멋진 결론입니다. (41-290)
하나님은 이성성상의 남성격 주체다 이겁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이 누구 같으냐? 우리와 같다, 나와 같다, 여러분들 같다 이겁니다.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격이라는 말은 반드시 상대격을 개재시켜 가지고 되는 겁니다. 그런 개념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상대격이라는 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주체격이라는 말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124-83)
창조원리에서 원리강의할 때 '하나님은 이성성상의 주체로서 격위에 있어서는 중화적 존재가 되어 있다.'고 간단히 말합니다. 중화적 주체가 되어 있다 하는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앉아서 그냥 하나님이 남성과 여성의 중화적 존재가 되어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무엇 중심삼고 중화되느냐? 사랑을 중심삼고. 중화적 존재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193-153)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느냐? 창조를 해 가지고, 창조이상 완성을 해 가지고 뭘하자는 것입니까? 하나님 자신도 사랑을 이루자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원리로 말하게 되면, 하나님은 이성성상의 중화적 존재입니다. 주체적 존재입니다. 이렇게 딱 한마디로 정립됩니다. 남성격을 갖춘 주체적 존재다 이겁니다. (149-9)
무엇이 통일적 기원을 가져오느냐? 혼자 계신 하나님을 통일적 자리에서 무엇이 기쁘게 해주느냐? 원리로 말하면 하나님은 이성성상의 중화적 존재로서 격에 있어서는 남성격입니다. 그 남성격이라는 것이 어떻게 남성격이 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남성격이면 주체이며 플러스인데, 상대 없이는 플러스가 없는 것입니다. 그 개념 가운데 무엇 때문에 플러스 격에 있느냐? 사랑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절대적 하나님도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싶다, 절대적으로 하나되고 싶다 하는 그런 바탕이 없게 될 때에는 통일이니 융합이니 화합이니 하는 것도 없습니다. 그건 근원이 없기 때문에 분산되어 버리고 맙니다. (195-20)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은 인간이라고 할 때, 인간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하나님이 사랑의 상대를 지은 목적은 기뻐하기 위해서입니다. 무엇을 중심삼고 기뻐하느냐? 사랑을 중심삼고입니다. 절대자이신 하나님도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이 이성성상의 주체로 계신다고 하였는데, 이성성상의 하나님이라고 할지라도, 반드시 사랑의 대상이 필요하기 때문에 천지만물을 창조한 것입니다. (223-300)
사랑이 남자와 여자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남자와 여자는 그냥 두 존재입니다. 남자와 여자만 연결시켜 가지고는 사랑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를 종합해 가지고 중심에 서서 움직이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면 남자와 여자가 화합해 가지고 사랑을 중심삼고 움직이는 것이 어디서부터 시작했느냐 하면, 하나님 이성성상에서부터인 것입니다. 남성 성품과 여성 성품이 화합하던 그것을 상대적으로 전개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사랑의 상대가 자기보다 낫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210-317)
통일교회 문선생은 지혜로운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성성상을 중심삼은 중화적 주체다.'라고 딱 결론을 지은 겁니다. 오른쪽으로 보면 남자로 보이고, 왼쪽으로 보면 여자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성성상이 그렇잖아요? 안팎으로 돼 있으니 위에서 보면 남자로 보이고, 아래서 보면 여자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여자도 '됐어!' 하고, 남자도 '됐어!' 한다는 것입니다. (139-56)
원인과 과정과 결과가 확실한 내용을 갖고 나오는, 과학적 논리와 같은 논리를 갖고 나오는, 그런 종교인이 나오지 않으면 종교세계를 구할 수 없습니다. 통일교회 원리가 그렇습니다. 이러이러하니 이렇다, 하나님은 이성성상으로 존재하신다, 우주의 존재가 주체와 대상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사랑의 주체고, 사람은 사랑의 파트너로 지었다 하는 결론이 딱 들어맞는 것입니다. 그것이 역사를 초월해서 사랑으로, 영원한 세계와 묶을 수 있는 힘의 작용으로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 계속하는 것이 천년만년 사랑의 작용으로 이어졌는데, 그것이 보통의 힘 같으면 약화될 텐데 약화되지를 않습니다. (219-178)
하나님도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통일교회도 그런 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계를 통일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만능의 하나님이다.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잘못입니다. 하나님은 뭐든지 할 수 있지만, 본래의 원리원칙에 있어서는 사랑은 둘이서 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성상을 이루게 되어 있고, 사랑도 그 조건 위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224-155)
하나님이 이성성상의 중화적 존재로 계신다면 이성의 중화적 존재의 중심은 뭐냐? 사랑입니다. 하나님도 사랑을 중심삼고 살아왔습니다. (193-303)
원리에서 논하고 있는 이성상상의 주체로 계시는 하나님은 어떠한 분인가? 이성성상의 하나님인 동시에 이성성상의 중화적 주체로 계시는 분입니다. 그 주체의 본질이 사랑입니다. 절대적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136-37)
원리의 총론이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표현했어요? 하나님은 이성성상의 중화적 주체인 동시에 사랑적 주체입니다. 사랑이란 이 말도 집어 넣어야 합니다. 그걸 반드시 집어 넣어야 됩니다. (223-160)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지어 이성성상을 분립한 중화적 존재가 되려면 무엇을 중심삼은 중화적 존재여야 되는가? 사랑을 중심삼고 중화적 존재라야 합니다. 그러면서 격위에 있어서는 남성적 주체격이어야 합니다. (194-64)
하나님이 인간을 왜 창조했어요? 이러한 근본 문제, 내가 왜 태어났느냐 하는 근본 문제를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주체입니다. 우리 원리를 보면, 하나님이 이성성상의 중화적 존재라고 말하지요? 중화적 입장에서 사랑을 중심삼은 통일적 존재라는 것은 아직까지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사랑을 중심삼고 통일적 존재라는 것을 첨부해야 합니다. (223-268)
남자의 사랑과 생명의 기원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이지요? 이성성상의 중화적 주체인 동시에 사랑의 근본인 분이 하나님입니다. 원리강론에 참사랑의 기원이라는 말을 집어넣어야 합니다. 참사랑의 기원이 하나님이라는 말을 집어넣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원리강론을 수정할 수 있는 주인공은 나밖에 없습니다. 그거 알아요? (224-228)
문제의 출발점은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인간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나님이 인간과 관계를 짓기 위해서는 인격적 신이어야 됩니다. 인격적 신이라는 것을 확실히 깨달은 것입니다. 인격적 신이 되려면 인간 같아야 됩니다. 인간에게는 마음이 있고 몸이 있는 것처럼, 이런 소성이 있느니만큼,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도 인간과 더불어 공동목적을 가질 수 있는 본체라면, 인간을 닮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성성상이라는 개념은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167-243)
하나님이 인격적인 신이라면, 하나님은 누구를 닮았을까요?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합한 그러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성성상의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여자와 남자를 합해 놓은 두루뭉수리가 아닙니다. 합해 놓았지만 주체격을 갖춘 분입니다. 이 주체격 무형의 신 앞에, 주체격을 대신해서, 남자와 여자가 하나돼 가지고 그 무형의 하나님 앞에 상대격을 갖추어서 묶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완성하는 것이요, 우리 인간 아담 해와의 이상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166-208)
동양 철학에서는 인격적 신을 몰랐습니다. 인격적 신이 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음양이라고 하는데, 막연한 음양은 인격적 기원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뿌리의 모든 것을 갖춰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요렇게 됐으면 남자 여자의 모든 소성을 갖출 수 있는 그런 뿌리가 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통일교회에서 가르치는 이성성상, 이 논리는 위대한 논리입니다. (145-196)
② 피조세계는 이성성상을 닮아 나왔다
우주에 근본되는 신이 계시다면, 그 신은 주체와 대상적인 관념을 가진 존재라는 이미지가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통일교회 원리에서 말하는 이성성상은 위대한 말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주체와 대상이 작용하기 시작하는 데에서 존속이 벌어집니다. 생겨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근본 밑에서 되었기 때문에 모든 우주는 이중적입니다. 이중적으로 되어 주고받는 상호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106-296)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성상을 닮았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이성성상의 분립체로 전개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주체와 대상 관계, 그 다음에 상하 관계?전후 관계?좌우 관계의 상대적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환경적 제도의 여건을 가진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사랑을 목적으로 하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106-57)
주체와 대상은 어디서 나오는가? 이것이 나올 수 있는 바탕이 있어야 됩니다. 통일교회에서는 이것을 이성성상이라고 합니다. 이 주체와 대상은 인간 자체에서 만들어진 주체와 대상이 아닙니다. 여기에 그 바탕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바탕이 이성성상이고, 이성성상 가운데는 본성상과 본형상이 있어야 됩니다. (33-36)
주체와 대상이 있어서 서로 작용하지 않으면 힘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힘은 혼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힘은 반드시 주체와 대상이 있어야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대상이라 할 때, 내가 마음에 나쁘다고 느껴져도 주체가 있어야 되고, 좋다고 느껴져도 좋다고 할 수 있는 주체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통일교회의 원리에 이성성상이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21-344)
우리 원리로 보면, 하나님은 이성성상의 중화적 주체입니다. 주체라는 것이 무엇을 중심삼고 성립되느냐? 사랑을 중심삼고 성립됩니다. 그러니까 횡적인 기반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극적인 기반을 다방면으로 갖고 싶어서 확대 전개시킨 것이 피조세계입니다. (193-217)
어떤 씨든지 두 조각이 한 꺼풀에 씌워져 있습니다. 콩 같은 것도 두 조각입니다. 하나님이 우주의 근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닮지 않고는 근본 씨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53-232)
생명의 씨는 반드시 두 쪽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천지이치입니다. 하나님은 이성성상으로서 한 분의 인격으로 되어 있습니다. 씨의 근본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씨에는 배아가 있는데, 배아에는 뿌리가 될 부분, 순이 될 부분이 있습니다. 자체가 다 존속할 수 있는 내용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대로 놔두더라도 완성한 실체를 구성할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262-147)
하나님이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 인간도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만물도 플러스 마이너스의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과 만물을 합하여 연결시키면 7수가 됩니다. 이것은 단계로 보면 3단계요, 벌여 놓으면 4위기대입니다. 이 3수와 4수가 조화를 이루어 통일이 되면 7수가 됩니다. 7수는 창조목적 완성수입니다. (26-187)
우주는 전부 플러스 마이너스로 되어 있습니다. 분자를 보더라도 플러스이온과 마이너스이온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부 상대권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원자를 보더라도 양자와 전자로 되어 있습니다. 우주 구성의 근본이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식물은 수술과 암술, 동물은 수컷과 암컷,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 되어 있습니다. 전부가 상대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상대적으로 되어 하나의 체제권으로 수습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주체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중심삼고 수습되어야 합니다. 그 창조의 의지에 일체화된 상대권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창조의 기쁨은 있을 수 없습니다. (247-183)
통일교회에서 하나님을 이성성상의 주체로 계신 분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부 다 과학적인 분석 결과에 의해 틀림없이 그렇게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체와 대상이 완전히 하나되면, 하나님의 힘이 그것에 영원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주체가 없고 대상이 없는 곳에는 힘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존재하느냐? 하나님 자체 내에 있는 주체와 대상의 힘이 주고받음으로써 영존합니다. (39-166)
원리는 이성성상을 말합니다. 이성성상이 왜 필요하냐? 이성성상이 없으면 창조의 조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이성성상이 있기에 서로 주고 받을 수 있는 것이요, 그것이 하나는 뼈와 같고, 하나는 살과 같기 때문에, 주고받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형태가 벌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성성상 그 자체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중심삼고 그 상대세계가 생겨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성성상은 창조적 묘미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27-340)
원리로 말하면 전체를 연결하는 것이 만유원력입니다. 모든 것에 하나님의 이성성상이 들어가서 그것이 전부 만유원력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핵심은 마찬가지입니다. (293-11)
남자에게는 여자의 성상이 있습니다. 여자도 남자의 이성성상의 요소를 갖고 있기 때문에, 남자가 살 수 있는 장소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성성상이기 때문에 여자한테도 남자한테도 살 수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한 상을 가진 남편도 여자가 이성성상의 요소를 갖고 있기 때문에 부인의 가슴 속에 머물 수 있습니다. 여자도 남자의 마음 속에 머물 수 있습니다. 하나입니다.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256-58)
아담 해와, 남자의 조상 여자의 조상입니다. 남자의 씨앗 여자의 씨앗입니다. 반쪽 씨앗입니다. 모든 것이 한 껍데기 안에 두 조각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우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된 하나님 가운데 이성성상이 있는 것인데, 그 이성성상에는 배아가 있습니다. 씨가 있고 핵이 있습니다. (253-249)
하나님도 무형의 주체이시기 때문에 실체 상대권, 절대적인 유형의 실체를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이론적인 결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이성성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형의 성상을 유형의 실체로 전개하는 창조를 위한 것입니다. 그것을 중심삼고 우주의 피조세계를 생각해 보면, 광물세계도 전부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가지고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분자로 볼 때는 플러스이온과 마이너스이온이 주체와 대상의 관념이고, 원자로 볼 때는 양자와 전자가 주체와 대상의 관념입니다. (228-140)
하나님은 여자 성품도 있고 남자의 성품도 지니고 있는 이성성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가운데 있는 남자의 성품을 모아 가지고 남자를 만들었으며, 여자의 성품을 모아 가지고 여자를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주체와 대상으로 갈라지며, 이 주체와 대상이 서로 수수작용을 하면, 이것이 다시 합쳐서 작용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통일교회의 원리에서 말하는 정분합작용이라는 것입니다. 이 위대한 통일교회 원리가 앞으로 철학에 있어서나 종교에 있어서 문제가 될 것입니다. (41-290)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을 이룰 수 있는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사랑의 뜻을 이루어 나가기 위한 것인데, 인간은 하나님 속에 있는 그냥 그대로를 드러낸 것과 같은, 하나도 안 빼고 전부 자기를 닮은 것과 같은 모양의 아들과 딸로 지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에서 말하는 이성성상이라는 말은 이 지구상에서 처음 듣는 놀라운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이성성상의 중화적 주체, 이게 어떠한 말이냐? 천지 이치가 다 들어가 있는 말입니다. (144-236)
사랑이라 할지라도 혼자 있는 데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둘이 화합하는 기준을 중심삼고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작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힘입니다. 사랑이 작동할 때는 쌍쌍이 다리가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만유의 전부는 사랑이상에 화합할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상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쌍쌍이 되도록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이성성상이라는 말을 붙였지요? (177-271)
전체를 규합해서 하나의 원칙적인 기본을 따져 보면 주체와 대상의 관계, 여기서 존재와 작용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주체와 대상에 의해 존재하고 작용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는 이것을 중심삼고 이성성상이라는 개념을 캐치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성성상이 그냥 있느냐? 스톱하고 있느냐, 움직이느냐? 움직인다면 어째서 움직이느냐? 왜 움직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손해보기 위해서 움직이느냐, 이익보기 위해서 움직이느냐? 작용하고 운동하는데 손해보기 위해서 운동한다는 법칙이 있다면, 우리의 이상작용이라든가 소망을 향해서 전진하는 작용은 있을 수 없습니다. 손해본다면 이것이 점점 작아져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작아져 가지고는 스톱해 버린다 이겁니다.
그러나 이 작은 것이 이익을 위해서 움직인다면 점점 커 갑니다. (125-72)
하나님 자신은 한 몸입니다. 이성성상의 주체로 계시기 때문에 자체 내에서 사랑한다고는 하지만, 생각으로는 '남성격 주체의 자리다. 여성격 대상이다.' 해 가지고 사랑을 느낄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남성과 여성이 분립된 입장에서는 자극적인 충격을 느끼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 해와가 하나님 자신을 제쳐놓고 자기들끼리 더 충격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볼 때, 사랑의 주체되시는 하나님은 나빠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 둘이 하나된 그 자리를 상대로 해 가지고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주체자이시기 때문에, 그 상대가 보다 가치적인 사랑을 느끼게 될 때, 하나님도 행복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인간 창조를 중심한 사랑의 제일 법도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랑의 교육을 받지 않고는 그 자리에 나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51-173)
힘이란 본래 작용하면 감소가 되는데, 사랑의 힘만은 작용하면 강해집니다. 무한히 확산된 것은 그 안에 무한히 집약된 힘이 있기 때문에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순환작용의 내적인 힘을 자체가 갖고 있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런 논리를 적용했으니 우리 통일교회에서 이성성상의 논리가 어디에나 적용되는 것입니다. 문선생이 지혜가 있기 때문에 그걸 다 캐치해 놓았습니다. (164-87)
참사랑이 얼마나 좋으냐 이겁니다. 하나님도 사랑 때문에 태어났습니다. 사랑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기분 좋지요? '아이고 문총재가 그러는데 하나님이 사랑 때문에 태어났대!' 하나님 붙들고 분석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이성성상까지 선생님이 분석했습니다. 이성성상에도 또 이성성상이 있지요? 여러분도 전부 남성 호르몬 여성 호르몬 나오지요? 모르면 병원에 가서 진찰해 보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다 통하게 돼 있습니다. (222-179)
창조원리의 이성성상이 왜 있어야 되느냐, 어떤 것이 주체이고 어떤 것이 대상이냐 하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따지고 따져 가지고 더 따질 수 없을 때 돌아 나온다는 것입니다. 암만 파더라도 돌아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년만년 그렇게 되니까 할 수 없이 '아, 이 길밖에 없구만. 더 찾을 필요 없다.' 하게 될 때 원리라는 말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리라는 것은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173-127)
③ 하나님의 우주 창조 동기는 사랑
하늘과 땅 자체도 스스로 있고 싶어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어떠한 힘의 원천에 입각하여 생겨났다는 것을 생각할 때, 여기에서도 더 한층 올라가 반드시 중심적인 주체를 갖추어 하늘땅을 움직이든가, 혹은 여기에 창조를 하든가 하는 힘의 작용체, 근본의 작용체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 있는 그분을 우리는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민족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다고 다르게 표현하는 명사가 문제가 아닙니다. 어차피 이 우주의 중심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전체가 작용하고 이동하더라도 그 이동하는 데에 따라 이동하지 않고, 움직이는 상대적인 세계의 중심에서 억천만 년 움직이지 않는 중심적인 본체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154-298)
우주의 근본을 헤쳐 봤을 때 하나님은 왜 생겨났느냐 하는 문제는 근본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은 왜 생겨났느냐. 무엇 때문에 생겨났느냐? 하나님은 무엇을 하느냐? 이런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맹목적인 신앙시대는 지나갔습니다. 덮어놓고 하나님을 믿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이러한 추리적인 결론에 이어서 적절한 신에 대한 내재적 성품, 외향적인 뜻에 대한 세계와의 관계, 신에 있어서의 안과밖의 관계, 이 관계라는 게 문제입니다. (191-13)
인간이 제1의 존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제아무리 잘났다고 하더라도 원인적 존재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제2의 존재입니다. 결과적 존재입니다. 그러면 이 우주의 원인적 존재는 무엇이냐? 신이 있다면 신 자체가 원인적 존재이며 절대자입니다. 그러한 절대자가 있다고 한다면 절대자 자신이 무엇을 필요로 할 것이냐? 무엇을 중심삼고 인간이나 피조물과 관계를 맺으려고 할 것이냐? 이것이 근본 문제입니다. 신학에서 취급해야 되고, 철학에서 취급해야 될 중요한 문제입니다. 신과 인간, 원인과 결과를 연결할 수 있는 내용이 무엇이겠느냐 이겁니다. (198-283)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어떻게 생겨났느냐? 사랑에 의해서 생겨났습니다. 우주의 근본은 어떻게 이뤄졌느냐? 사랑의 씨앗이 있어 그것이 상대를 중심삼고 흡수하다 보니 하나님 자체가 성상과 형상으로 구성되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중심삼고 그렇게 되어 있느냐? 사랑을 중심삼고 형성되어 있습니다. 여러분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에 의해서 받은 여러분의 생명의 씨, 한 세포가 커 나와서 지금 여러분이 생겨난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그렇게 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눈이 생겨나고 코가 생겨나고 이렇게 생겨났습니다. 딱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207-27)
참사랑이라는 것은 제일 깊은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래, 참사랑의 기원이 뭐예요? 하나님, 갓(God)입니다. '갓' 하면 한국에서는 옛날 사람들이 쓰던 모자를 갓이라고 그래요. 모자는 꼭대기에 쓰는 것을 말합니다. 같은 뜻입니다. 여기에서 성상과 형상이 왜 갈라지느냐가 문제입니다. 우주의 근본이 어디냐? 우주의 근본이 어떻게 생겨났느냐? 이게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생겨났느냐 이겁니다.
하나님을 봤습니까? 그거 어떻게 생겨났습니까? 여러분이 어떻게 생겨났습니까? 우주의 모든 요소의 진액을 종합해 태어난 이것이 바로 '나'입니다. (207-24)
사랑의 중심은 하나님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주 생성 이전부터 있는 유일적이요 영원적이며 불변적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심정의 흐름입니다. 내적인 심정이 외적으로 흐르는 것이 사랑입니다. 고로 하나님의 본질은 심정입니다. 이러한 신이 바로 존재론적으로 다룬 우주생성의 근본 원인인 통일적 존재였던 것입니다. 이 근본 원인에서의 우주의 생성이 바로 하나님의 우주창조였음은 재언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신은 어떻게 우주와 인간을 창조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심정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심정이 있는 곳에서만 생명이 나타날 수 있으며, 생명이 있는 곳에 발전 운동(창조)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창조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는 바, 그 이유는 심정이란 본래 목적을 지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창조목적은 심정을 충족시키는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기쁨은 피조물, 특히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을 때 오는 것입니다.
고로 하나님의 사랑과 창조성을 닮은 인간과 국가가 하나님이 창조코자 하는 목표였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이상이 그것을 추구하는 것으로 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상이란 당연히 향유하도록 되어 있는 세계를 추구하는 열망인 것입니다. (65-258)
우주의 근본이 뭐냐? 이 우주가 생겨나기 전에는 무엇이 있었느냐? 하나님? 하나님만 있었어요? 사랑이 보여요? 사랑은 실체가 없는데 사랑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랑은 컨셉(concept;개념)입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도 사랑은 컨셉입니다. 하나님에게도 사랑은 컨셉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293-132)
하나님이 창조를 왜 했느냐? 사랑 때문에 했습니다. 사랑은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혼자 있는 사랑은 종적인 사랑이기 때문에 환경적 여건이 없습니다. (193-303)
하나님은 절대자인데, 무엇이 그리워서 사람을 창조했느냐? 무슨 황금이나 지식도 필요하지 않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갖추지 않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하나님이 무엇이 필요해서 사람을 지었는냐? 즉 창조의 근본 동기가 무엇이냐? 그것은 권력도 아니고, 지식도 아니고, 소유도 아닙니다. 하나님에게는 사랑의 기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도 혼자서는 사랑을 못 이루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지창조의 동기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149-149)
하나님은 왜 천지를 창조했느냐? 그 전지전능한 절대자가 무엇이 없어서 사람을 창조했느냐? 사랑 때문에 창조했습니다. 사랑은 상대가 없이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상대가 없는데 작용하게 되면 손해가 납니다. 전부 자기를 보호하게 되어 있습니다. 절대 손해나는 곳에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사랑은 상대가 나타나면 없는 것 같은데도 뛰쳐 나옵니다. 하나님에게도 사랑이 있는데, 남성적인 하나님이 가만히 혼자 있을 때는 그 사랑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것을 나타내 보일 수 있는 상대가 바로 사람입니다. (60-76)
전지전능한 하나님, 무소부재한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해서 사람을 지었을까요? 하나님에게 돈이 필요하고, 금덩이가 필요하고, 다이아몬드가 필요합니까? 그런 것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면 지식이 필요합니까? 하나님은 지식의 왕이기 때문에 지식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렇다면 권력이 필요합니까? 하나님에게 권력이라는 것은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입니다. 하나님에게 부족했던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이란 상대적 관계에서만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고는 이 창조세계와 인간세계가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가지고 찾아오지 않고는 존재세계와 상관이 없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을 표준으로 정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121-100)
하나님이 왜 천지를 창조했느냐? 아무리 절대자라고 하더라도 혼자서는 기쁨을 느낄 수 없으며, 설령 기쁘다 하더라도 기쁨의 자극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창조를 했습니다. 절대자가 아무리 '나는 절대자다. 나는 사랑의 주인공이다. 생명의 주인공이다.'라고 한다 해도 절대자 혼자서는 사랑의 자극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요, 천지가 내 몸 속에 있다는 생명의 자극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38-152)
하나님이 자신만 생각했다면 천지창조를 했겠어요? 창조는 힘의 투입을 말합니다. 예술가는 최고의 걸작품을 만드는 것이 소원입니다. 예술가는 걸작품을 만들기 위해 온갖 정성을 투입합니다. 전부를 투입하는 데서만이 완전한 걸작품이 나옵니다. 더 이상 할 수 없다 했을 때 비로소 걸작품이 생겨납니다.
창조는 투입하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힘을 투입해야 창조가 가능합니다. 힘을 투입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생겨나지 않습니다. 완전한 투입을 하는 데서 완전한 대상이 성립한다는 원칙을 두고 볼 때, 하나님은 주체로서 대상을 만들기 위해 완전히 투입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대상을 위해 있겠다고 운동을 시작한 것이 창조입니다.
창조한다는 것은 힘의 투입을 말합니다. 투입을 했는데, 얼마나 투입했느냐? 하나님이 말씀으로 지을 때 '이렇게 되어라, 저렇게 되어라.' 하고 장난식으로 창조한 것처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참된 생명을 완전히 투입하고, 참된 사랑을 완전히 투입하고, 참된 이상을 완전히 투입했습니다. 우리도 정성 안 들이고 피와 살을 투입하지 않은 것은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하기 전과 창조하고 난 후가 다릅니다. 창조하기 전에는 자기를 생각했지만 창조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대상을 위했습니다. 내가 있는 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를 위해서다, 아들딸을 위해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자기보다도 더 훌륭한 사랑의 상대를 만들려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요소, 보이지 않는 무형의 요소를 백 퍼센트 실체화시키기 위해서 투입하고도 더 투입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이 뜻하는 것은 투입하고 잊어버릴 수 있는 그 자리에서만이 참사랑의 기원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간단한 내용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주의 근본원리입니다. (203-197)
사랑을 점령하려면 투입하고 잊어버리고 투입하고 잊어버려야 됩니다. 왜 그러한 사랑을 가져야 하느냐? 사랑은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작아지는 것이 아니고 커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학세계에서의 자연현상은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작용하면 작용할수록 작아지지요? 자연세계는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작아지지만, 참사랑의 세계는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커 갑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참사랑을 중심삼고 창조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37-106)
우주가 어떻게 출발했느냐? 하나님을 두고 볼 때 전부가 위하는 데서부터, 투입하는 데서부터 출발한 것입니다. 자기를 소모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면 자기를 소모해 가지고 상대를 만들어서 무엇을 하자는 것이냐? 둘 다 소모하는데, 소모하고 얻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만 가지면 아무리 소모해도 좋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개념이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님이 창조를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손해나는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투입하는 것은 손해인데, 하나님이 왜 그렇게 했겠습니까? 사랑에는 모든 것을 채우고도 남을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에 소모시켜서 투입했지만, 그 대신 사랑을 찾아오는 것입니다. 참사랑은 투입할수록 점점 작아지는 것이 아니고,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커갑니다.
그렇지 않고 참사랑이 작아진다는 원리라면, 하나님 자체가 투입해가지고 소모되는 것입니다. 반대가 됩니다. 참사랑은 투입하면 투입할수록 커가는 것입니다. (237-106)
사랑에는 창조능력이 있기 때문에 지치지 않습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지면, 아무리 투입해도 소모된 에너지 이상 언제나 보충할 수 있는 사랑의 힘이 있기 때문에 지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렵고 고통스럽더라도 싫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이 싫으면 갈 수가 없습니다. 사랑을 위하는 길에는 싫은 마음을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참사랑을 위하는 길에는 영원히 싫은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에는 원수의 개념이 없습니다. 악의 개념이 없습니다. 그것은 참사랑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237-106)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중심삼고서 투입, 투입, 투입해야 합니다. 투입을 하면 돌고 도는 겁니다. 공기를 예로 들어서 절대 저기압과 고기압이 있다면 그 중간의 기압이 생깁니다. 누가 부르지 않아도 하늘이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백 퍼센트 이상 투입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항상 하늘이 채워주는 것입니다. 우주의 원칙이 그러합니다. 완전히 투입하고 잊어버리는 데는 영원한 운동이 연결되기 때문에 그 기준에서 영생의 논리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영생, 영원한 생명, 그렇지 않으면 통일원칙을 어디에서 끄집어 낼 수 있겠습니까? 위하게 되면 빙빙 돌지요? 빙빙 돌아서 어디로 갑니까? 점점 작아져서 올라갑니다. 올라가는 것입니다. 빙글빙글 돌아 넓게 퍼지면 내려가지만, 점점 쓱 해서 올라가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동적으로 아담 해와의 어깨 위에 양쪽 발을 올려놓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5-27)
하나님이 왜 계시느냐? 무엇 때문에 계시려고 하느냐? 사랑 때문에 계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상대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사랑의 상대를 창조해야 되었던 것입니다.
창조의 본질적 이상이 사랑을 중심삼고 창조를 시작했다는 것을 그동안 우리가 전혀 몰랐다는 것입니다. 사랑 때문에 모든 피조세계가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208-231)
하나님의 소원은 참되게 줄 수 있는 세계적인 발판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는 데 있어서도 어느 누가 참소할 수 없고, 받는 데 있어서도 어느 누가 조건을 제시할 수 없는 자유롭고 평화롭고 행복한 자리를 소원합니다. 그러한 자리를 세계적으로 넓혀서 온 만민을 거기서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거두려는 소기의 목적입니다.
사랑이 먼저냐, 생명이 먼저냐? 사랑이 먼저입니다. 지구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나왔다고 생명이 제일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제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천지창조를 생명에서부터 했다고 하더라도 그 생명의 발원지, 동기는 사랑입니다. 생명이 생겨난 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세계 제일이 되는 것이 뭐냐? 하나님이 제일입니다. 그 자리에 올라가는 겁니다. 올라가서 뭘 하자는 것이냐?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우주를 내 것으로 만들자는 것입니다. 그래 여러분도 다 욕심 있지요? 그 욕심, 욕망 모두를 완성하는 데는 돈 가지고, 자기 지식 가지고, 자기 권력 가지고 안 됩니다. 오직 사랑입니다. 이것이 통일교회 원리의 진수요, 인생철학의 근본입니다. 지금까지 이것을 몰랐습니다. 간단한 내용입니다. (144-132)
2) 우주는 주체와 대상으로 되어 있다
① 쌍쌍제도가 우주 존재 원칙
만물은 광물세계나 식물세계나 사랑을 바탕으로 한 사랑의 주체와 대상 관계의 인연을 통해서 이상적 분모를 지니고 태어났습니다. 만물은 결과의 존재입니다. 결과의 존재는 원인적 내용 없이는 태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원인적 존재를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중심삼은 사랑권 내에서 동서남북 상하 전후좌우를 막론하고 언제나 화합하고 화동하기 위해서 모든 광물세계도 페어 시스템(pair system;쌍쌍제도), 주체와 대상의 관계로 존재합니다. 이렇게 쌍쌍제도로 구성돼 있다는 것입니다. 광물세계도 동물세계도 식물세계도 인간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173-35)
창조를 하는 데는 인간을 중심으로 인간을 모델로 했습니다. 천지만물은 동서 사방에 벌여 다리 놓아 가지고 지은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만물?광물?식물?동물계 전부가 쌍쌍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부 쌍쌍으로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종적인 길과 횡적인 길을 쌍으로 엮으면서 나가는 것입니다. 지그재그하는 놈, 이렇게 운동하는 놈, 별별 형태의 작용을 거치면서 쌍쌍제도를 중심삼은 만물은 이상적 사랑을 찾아가는 인간의 교재들입니다. (173-211)
모든 피조물이라는 것은 주체 대상의 쌍쌍제도로 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어 있느냐? 모든 피조물, 존재세계는 그 나름의 사랑을 절대시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중심삼고 주고받고 하나되기 위해 주체와 대상관계, 쌍쌍제도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안 되어 있는 것이 없습니다. 다 사랑 때문에 태어난 것입니다. (209-89)
우주에는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반드시 필요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주체와 대상의 인연을 따라서 존재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이 우주는 쌍쌍제도의 컨셉을 중심삼고 지어졌습니다. 그렇게 생겨난 것은 사랑을 중심삼고, 사랑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겨났다고 하는 결론을 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광물도 마찬가지입니다. 플러스이온과 마이너스이온이 주고 받습니다. 식물세계도 반드시 암술과 수술을 중심삼고, 동물도 암놈과 수놈을 중심삼고 다 존재하는 것입니다. (207-9)
광물세계도 양이온과 음이온, 전부 쌍쌍으로 되어 있습니다. 107개나 되는 원소도 아무것에나 가서 붙지 않습니다. 실험실에서 아무리 강제로 붙여도 안 됩니다. 그러나 자기의 상대가 되면 하나되지 못하게 억지로 별별 짓을 해도, 하나님이 말려도 재까닥 붙습니다. 그거 알지요? 전부 쌍쌍제도로 되어 있습니다. 광물도 그렇고 동물도, 식물도 그렇습니다. 전부 쌍쌍제도로 되어 있습니다. 다 음양의 이치를 통해 있습니다. (203-295)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페어 시스템으로 돼 있다는 겁니다. 쌍쌍제도로 돼 있기 때문에 광물세계?식물세계?동물세계를 막론하고 그들이 연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체 대상과 사랑이라는 개념을 중심삼고 전부 연결되게 돼 있다는 것입니다. (189-190)
사랑을 가지고는 안 통하는 데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우주는 쌍쌍제도로 되어 있습니다. 광물세계도 쌍쌍제도입니다. 식물도 쌍쌍이지요? 동물도 쌍쌍입니다. 무엇을 중심삼고? 급은 다르지만 수직의 사랑을 중심삼고. 차원은 다르지만 이 대우주의 사랑을 중심삼고 어느 공간이든 전부 그렇다는 것입니다. 평형선상의 위치에 자기 존재를 결정해 가지고 우주 공간에 떠 있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모두 사랑 때문에 그렇게 생겨난 것입니다. (198-304)
모든 피조세계는 쌍쌍의 조직체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광물세계도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플러스 마이너스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중력을 가진 지구성 위에서도 강한 인력관계를 갖고 있는 지남석은 그 인력이 지구 중력보다도 강하기 때문에 작용이 표면상에 나타날 뿐이지, 지남석 이외의 모든 요소들도 플러스 마이너스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의식화 운동도 전류를 통한 플러스 마이너스 작용을 통해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쌍쌍제도의 중심이 뭐예요? 그 중앙에는 자기 나름대로 둘을 연결시키고 보호할 수 있는 중심축이 있나니, 그 축이 바로 사랑의 축입니다.
그래서 광물세계의 원소들도 상대기준이 되는 것끼리는 스스로 하나되지만, 상반된 원소끼리는 아무리 하나님이 명령하고 또 어떠한 실험실 주인이 명령을 하고 암만 천년 공을 들여도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197-164)
우주는 사랑을 떠나서는 살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쌍쌍제도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곤충들도 수놈과 암놈이 있지요? 어떤 때는 뜰 같은 데 나가서 흙을 한번 파 봅니다. 많은 벌레가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많은 벌레가 있는데, 그것도 암놈과 수놈이 있습니다. 그것도 새끼 낳고 젖 먹입니다. 그것들도 말한다는 것입니다. 말하는 것을 감촉하니, 이거 수놈과 암놈이 이렇게 좋아하니 그 무슨 힘 가지고 그런 조화를 일으키는 거예요? 곤충세계에도 사랑이 있지요? 수놈이 암놈을 따라가고, 암놈이 절대 수놈을 따라갑니다. (191-220)
광물세계도 쌍쌍으로 돼 있습니다. 양이온과 음이온을 중심삼고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사랑을 중심삼고 이 꼭지만 딱 뽑게 되면 하나님도 끌려오고, 참부모로부터 모든 세계 인류가 전부 신경의 힘줄에 달려 끌려오는 것입니다. 모두가 쌍쌍제도로 돼 있습니다. 급은 낮지만 사랑의 천리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203-244)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은 모든 것은 쌍쌍제도입니다. 광물세계도 쌍쌍제도여서 급은 낮지만 양이온과 음이온도 사랑을 표시하면서 엉클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레버런 문이 이 세상에 나와 가지고 역사 이래로 처음 발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도 참사랑을 절대시하고 그것에 절대 복종하고 살겠다는 그 기원을 발표한 것은 레버런 문이 역사상에 처음입니다. 그것은 관념이 아니고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참사랑을 찾기 위해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203-103)
미물도 그 나름대로의 사랑을 중심삼고 이 우주의 쌍쌍제도라는 창조이상권 내에서 같은 자리, 같은 요소를 지닌 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너는 크고 나는 작지만 둘이 하나되어 나누어 줄 수만 있으면, 억천만세가 가더라도 나를 나누어 줄 수 있다고 자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과 다릅니다. 원소세계가 하나될 때는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자기 짝짝을 따라가서 하나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데데하게 이게 뭐예요? 그러니까 본질에 일치가 안 되니 이게 사고입니다. (209-189)
세상만사를 보게 되면, 전부 쌍쌍제도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걸 거느리고 삽니다. 하나님이 볼 때 '야! 너도 나를 닮았구나. 너도 혼자는 외롭지?'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우주는 급은 낮지만 전부 이상적 쌍쌍제도로 전개시켜 놓은 충만한 자연박물관이다 이겁니다. 자연박물관인 동시에 사랑의 박물관입니다. 어때요? 지나가면서 길가의 소나무나 그 많은 미루나무를 언제나 보듯이 그렇게 무심히 봤지요? 이것을 바라볼 때 '너도 나와 같이 주체와 대상이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랑의 쌍쌍적인 인연을 갖고 사는구나! 너와 나를 비교할 때 오늘날 나는 혼자 살고 있고 이렇게 타락한 생활을 하게 되니 너한테 부끄럽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세계에 이르게 되면 낙후된 인간이라도 가치가 얼마든지 있다는 것입니다. 그걸 보고 존경할 수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