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엇이든 주고싶어 하는 부모의 마음
자식을 낳아 길러 본 부모들은 알 것입니다. 애지중지하는 그 아들딸을 통하여 복을 받고 싶고 행복도 느끼고 싶을 것입니다. 또한 기뻐하고 복받을 수 있는 기준이 있으면 그 아들딸에게 영원히 남겨 주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한 소망의 마음을 가지고 그 아들딸이 고이 자라, 만국으로부터 추앙을 받고 만세에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되기를 타락한 인간도 바라고 있습니다.
밤이나 낮이나 그 아들딸이 상처를 입을까 보호하고, 애달픈 심정으로 초조해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타락한 부모의 마음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품 안에서 젖을 먹여 키우는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 자식이 똥 싸고 오줌을 싸서 냄새가 나더라도 사랑으로 그 환경을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타락한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사랑의 주체 되시는 하나님께서 본연의 심정을 통하여 아담과 해와를 사랑하고 싶었던 그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겠습니까?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여러분들이 애기를 품고 키울 때에 잠자리에서 노래를 불러주고 혼잣말로 얘기도 해주며 잘되기를 바라는 그 마음은, 부모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못나고 부족한 부모라도 그 자식에게 결함이 있으면, 부모의 마음은 그 가슴이 몽땅 젖도록 최고의 고통을 겪는 것이요, 이것이 풀어지면 그 고통에 비례한 만큼 기쁨이 동반되는 것입니다. 타락한 부모의 마음도 그러한데 하나님의 마음이야 어떠하시겠습니까? (선집 20-209)
부모는 아들이 죄를 지어서 감옥에 가면 '이놈의 자식 잘 갔구나'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식을 용서하고 눈물을 흘리며 사랑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사랑이 귀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 아들이 사형수가 되어서 죽는 시간이라면, 아들이 사형받는 시간을 어머니가 안다면 통곡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법을 다 변경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아들을 구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 있다면 무슨 모험이라도 생명을 바쳐 하겠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 변치 않는 사랑을 갖고 있기 때문에, 부모의 사랑은 귀하다는 것입니다. 자기 몸을 치고 자기 몸을 잃어가면서, 자기를 희생해 가면서 자식을 위해서는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선집 91-148)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는 자식을 사랑해 주게 될 때 '내가 너에게 며칠 날 고무신 사 주고 옷 사 주고 너를 위해서 피땀을 흘렸는데, 그 가치는 몇천 몇백 몇십 원이다'하며 치부(置簿)합니까?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데는, 세상의 왕궁의 왕자 왕녀 이상 해주고 싶지만, 그 이상 해주고 싶은 마음을 느끼는 자리에서, '내가 정성을 다해도 이것밖에 없으니 미안하다' 한다는 것입니다.'그 이상 더 좋은 것 해줄게' 하는 마음을 부모는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사랑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걸 알아야 합니다. 주고도 부족함을 느끼고, 사랑하고도 덜 사랑한 것이 있지 않겠나 하며 더 사랑하고 싶은 마음, 주고 나서 섭섭하고 안된 마음, 이러한 것이 있기 때문에 이것은 영원한 사랑과 통하는 본질에 속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출발의 전통적 동기입니다. (선집 60-84)
부모는 자식을 대함에 자기의 제일 좋은 것을 전부다 주고파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이것은 누구를 닮아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을 닮아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자식 되는 사람이 진짜로 나타나면 그에게는 자기보다 더 귀한 것을 주고 싶어하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선집 56-147)
여기 중년 이상 되시는 여러분들에게 '옛날 젊은 시절에 자기의 상대를 구하는 데 있어서 자기보다 못난 사람을 구하고 싶었습니까, 아니면 자기보다 잘난 사람을 구하고 싶었습니까?'하고 묻는다면, 대답은 그 누구나 동일할 것입니다.
못난 사람이 아니라 잘난 사람입니다. 그것은 동서양의 누구를 대해서 물어도 그러한 결론이 내려질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사랑하는 부모가 자식을 대할 때는 그 자식이 부모 된 자기보다도 못나기를 바라는 부모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미남 미녀가 결혼을 해서 첫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기의 얼굴이, 그 부모의 얼굴에 비하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닌, 생기고 싶은 대로 생긴 얼굴이라 해도, 그 부모에게 당신의 아기는 당신보다도 잘생겼다고 칭찬하면 칭찬할수록 그 부모는 기분이 아주 좋아지는 것입니다.
부모의 심정이란, 아주머니의 얼굴이 잘생겼다고 하더라도 그 아주머니가 안고 있는 아기를 보고 지나가던 사람이 '야! 그 녀석 엄마보다 몇천만 배나 더 잘생겼군'하면 좋아합니다. 그건 엄마는 그 아기보다 몇천만 배 못생겼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말을 듣고 '뭐라고? 나보다 몇천만 배 잘생겼어? 그럼 나는 몇천만 배 더 못생겼다는 얘기 아니야?'라고 하면서 대드는 엄마는 없습니다. 그저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그렇게 하는 마음이 누굴 닮았겠느냐? 어머니는 결과적 존재이지 동기적 존재가 아닙니다.
아들이 아버지보다 못하기를 바라는 집안이 있다면, 그 집안은 망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대통령인데 아들은 그보다 못하게 될 때는 그런 형태로 몇 대를 가게 되면 그 집안은 점점 망하는 것입니다. 맨 나중에는 쥐구멍을 찾는 신세가 됩니다. 그래, 자식이 아버지에게 '내가 아버지보다 못하면 되겠습니까?' 하면 아버지가 '예끼 이놈!'하겠느냐, '오냐 그래라'하겠느냐? 후자를 택하는 것입니다. (선집 41-283)
어떤 부모도 가정의 책임을 맡기기 위해서 자기의 후계자를 내세울 때는 자기보다도 못한 자를 후계자로 세우기를 원치 않습니다. 왜 그러냐? 자식이 자기보다 나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부모는 절대로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나라를 중심삼고 볼 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라의 주권자는 자기 이상의 후계자가 나오기를 바라는 주권자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에 있어서나 국가에 있어서나 그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보다 훌륭하고, 자기보다 모든 것을 더 갖추고 있는 후계자가 나오기를 바라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의 변천을 초월하여 영원에 가까운 요구조건입니다.
부모의 사랑이 영원히 지속되기 위해서는 그 전통을 계승한 누군가가 있어야 합니다. 분명히 자녀들이 상속자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그러한 전통의 상속자가 되도록 교육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전통을 보다 높은 가치로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각 세대마다 기존 전통의 중요함을 인식해야 하고, 그 전통을 계승할 뿐만 아니라, 미래를 향해서 발전시켜야 합니다.
그러한 전통은 항상 자기의 자녀들이 자신들보다 더 낫기를 열망하는 부모들이 있는 참된 가정에서만 출발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열망을 가진 부모들은 끊임없이 자녀들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격려해 줄 것입니다.
그러한 부모들은 자녀들이 그들보다 더 훌륭하게 될 수 있는 그날을 고대하며, 자녀들에게 가능한 한 최선의 여건을 마련해 주고자 정성을 다할 것입니다. 이러한 부모들은 자녀들의 행복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할 것이며, 심지어는 자녀들을 부모보다 더 훌륭하게 만들어 주는 방향으로 기꺼이 강요하기도 할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이 자기보다 나을 때 행복을 느낍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로 태어났다가 자기보다 못한 아들딸을 낳게 되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면목이 없어집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상 자기 아들딸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자녀도 이러한 생각을 할 때 자동적으로 사랑의 세계는 나타나고 천국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성약 Ⅰ-1007)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사랑의 그 기원적인 동기는 어디서부터 시작했느냐? 남자 여자를 중심삼은 사랑은 변하는 사랑인데, 거기서 태어난 아들딸을 중심삼은 사랑은 왜 변하지 않느냐? 이것은 그 남녀를 중심하는 사랑에서 되어진 사랑이 아닙니다. 변하지 않는 사랑은 횡적인 부부의 인연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종적인 어떠한 흐름의 기원을 통하여서 관계되어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 종적인 주체가 누구냐? 그런 주체를 우리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 사랑은 부부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 사랑 앞에 내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하는 입장에 서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끊으려 해도 끊을 수 없습니다. 횡적인 인연으로서 어떻게 터치(touch)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그 사랑은 만고불변입니다.
오늘날 민주사회에 있어서, 개인주의 사상이 팽배한 이 때에, 자식들이 하는 말이 신시대와 구시대는 차원이 다르다고 하지만, 자식들은 그렇게 변했지만, 그 부모의 마음은 구시대니 신시대니 부르짖는다고 해서 '너 그러니 나 그러자'하게 되어있지 않습니다. 부모의 사랑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동물도 그렇습니다. 새끼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는 자기의 생명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선집 48-155)
그러면 그런 사랑은 어디에서 왔느냐? 나 자신이 제1의 어떤 상대적인 결과의 존재라면, 그것은 제1의 어떤 힘의 인연 가운데서 온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으로서는 터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사랑을 혁명하자! 혁명의 기수가 되자!'하는 사람 보았어요?
만약에 어떤 부모가 이 사랑을 혁명해서 인류역사를 개조해 버리겠다 해 가지고 '나는 부모는 부모지만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나섰다고 합시다. 그렇지만 그 부모는 자식의 배꼽이 떨어지는 순간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자연적으로 발생할 것입니다. 모든 생물은 어떠한 고하(高下)를 막론하고 자기 새끼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데 생명을 투입해서, 생명을 고임돌 삼아 가지고도 하고 싶어하는 작용이 있는 것을 보게 될 때, 만고불변에 가까울 수 있는 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그것은 절대성(絶對性)을 찾아 나가는 데 있어서 절대 그 자체는 못 되지만, 인간 앞에 제일 가까운 고임돌은 될 수 있습니다. 단 하나의 발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것이 인간세상에 있어서 그래도, 역사를 보게 될 때 영원한 발판이 되어 있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부모의 사랑은 어디에서 왔느냐? 그것은 아버지에게 어떠한 권고를 받아서 배운 것도 아니요, 자기 상대에게 충고를 받아 배운 것도 아니요, 자기 자신이 그래야겠다고 생각해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자연히 그리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자연히 그리 되는 데서 성립되는 것입니다. (선집 48-156)
본질적인 사랑을 분석해 보면 사랑에는 혁명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참사랑에 해당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시조 때부터 사람이 자식을 사랑한 마음이나 수 천 년 후의 후손인 우리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똑같은 것입니다. 또한 수 천 년 후에 우리의 후손들이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도 같을 것입니다.
사랑에는 발전도 없고, 종식도 없습니다. 혁명의 요건이 필요치 않은 순수한 것이 참사랑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한 것이냐? 하나님이 어떤 존재를 절대적인 기준의 자리에 세워 놓고, 그의 존재성을 인정하고, 그를 사랑하신다면, 그 사랑은 더 이상 혁명이 필요치 않는 사랑입니다. (선집 18-12)
사랑은 홀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생명이 투입되지 않고는 사랑이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부자관계의 사랑을 두고 보더라도 거기에는 생명의 인연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생명의 인연이 남아 있는 한, 생명의 인연 속에서 소원을 갖고 있는 한 거기에는 반드시 사랑의 인연이 남아지는 것입니다.
생명의 인연을 떠나 가지고는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에는 반드시 생명의 인연이 투입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생명을 얼마만큼 투입해 가지고 사랑하느냐에 따라, 보다 가치있게 느끼느냐, 안 느끼느냐 하는 문제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선집 32-15)
예를 들면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그냥 그대로 생활적 인연만을 통해서 하는 사랑이 아닌, 뼛골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인 것입니다.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고, 끊으려 해도 끊을 수 없는, 사랑의 마음을 부모는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여력이 남아 있는 한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식과 생명의 인연이 맺어져 있다는 것을 느낄 때, 부모에게서는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자연적으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저 애는 내 아들이니까 사랑하겠다는 의식적인 마음이 앞서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보다도, 그 인연보다도 앞선 자기의 생명력이 자식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들이 가정생활에서 잘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선집 32-15)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냐 할 때, 천년만년 주고도 또 주고 싶은 그런 마음을 끊임없이 갖고 계신 분입니다. 그런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것이지, 주고 나서 '야, 요거 몇 냥 몇 전이다'라고 하시는 장사꾼 하나님이라면 그런 하나님은 필요없습니다. 만민은 왜 하나님을 좋아하면서 따라가야 하느냐?
하나님을 왜 좋아해야 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하나님은 만민을 위하여 모든 것을 주시고 또 주시면서도 부끄러워 하시며 '지금은 이것밖에 안 되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라, 몇백 배 몇천 배 더 좋은 것을 줄 터이니…' 하시면서 오늘 현재에 주신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주면서도 미래에 더 좋은 것을 주겠다는 약속을 하시며 주실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고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과 더불어 있으면 비록 못 먹고 못 살더라도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못 먹는 자리에 들어간다면 미래의 소망 된 자극이 현실권 내에 충격적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도리어 새로운 결심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면서도 부끄러워하는 자리, 그런 부모를 가진 자식이 '엄마'하고 끌어안게 되면 몸만 끌어안겠습니까?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그 자리는 미래를 위해 서로 위로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자리입니다. 절망이 같이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의 소망을 현재의 자극으로 여기고, 서로 결의하고, 서로가 맞부딪쳐 가지고 격려할 수 있는 폭발적인 자리가 바로 그런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비참한 것이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자극을 끌어들여 가지고 현실권내에서 가치를 찬양할 수 있는 자리는 그러한 사랑권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랑권내에 사는 사람은 불행이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선집 36-291)
부모는 사랑하는 자식에 대해서 전체를 희생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해서 투입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자신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위해서 있겠다는, 상대를 위하는 하나님의 자리에 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위해서 있겠다고 하면, 그건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자기를 전부 다 자식한테 희생해 가지고 그 자식과 더불어 있겠다고 하는 데서 사랑이, 생명이, 희망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선집 69-62)
선생님이 어렸을 때 새 둥지를 많이 보았습니다. 새 둥지를 보려고 올라가 보게 되면 어미가 와서 쪼아댑니다. 결사적입니다. 한 번만이 아닙니다. 쳐 버리면 맞고 날아가면서도 또 옵니다. 이걸 볼 때, 자기 생명을 넘어서 사랑하는 새끼를 보호하려는 동물세계의 힘이 있는 것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을 위해서 생명을 투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참된 사람입니다. 진짜 선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사랑을 뿌리로 해 자기 생명을 던져가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거기에는 주체적 선이 있는 것이요, 상대적 선의 논리를 세울 수 있는 겁니다. 이것은 만고불변입니다. (선집 186-18)
내가 미국 댄버리교도소에 있을 때 재미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비탈길을 테니스 코트로 닦기 위해 매일 불도저로 미는 작업을 했는데, 오랫동안 했습니다. 작업을 하다가 중지하기도 하고, 또 우기(雨期)가 되면 건기(乾期)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한 두서너 주일 우기가 지난 후 작업을 하는데, 거기에 물새가 새끼를 쳤습니다. 그 곳에는 죄수들이 운동 삼아 걷는 코스가 있는데, 거기서 불과 3미터 떨어진 곳에 물새가 둥지를 틀었습니다.
그 물새 빛깔이 얼른 봐서는 알아볼 수 없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은 모릅니다. 그 보호색이 얼마나 잘 되었는지 모릅니다. 알을 낳아 까기 전까지는 사람들이 다니면서도 몰랐습니다. 엎드린 모습을 옆에서 보면 까만 자갈돌 빛깔 같은 보호색이어서 몰랐습니다. 그러다 새끼가 부화되어 뭘 물어다 먹이다 보니 소리가 '찍찍' 나게 되어 다 알게 됐습니다. 짓궂은 녀석들은 별의별 놀음을 다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물새가 자기 새끼들에 대해서 얼마나 보호력이 있는가 하면, 먹이를 구해서 물고 올 때 절대 자기 새끼 가까이 날아오지를 않습니다. 딴 곳에 내려서 새끼 있는 곳까지 기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매일 방향이 다르더라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새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방향을 달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새끼를 키웁니다.
이 새끼들이 점점 자라게 되면 사람이 그 옆에만 가도 어미가 쪼아대며 야단입니다. 새끼를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가르쳤느냐? 그게 우주의 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축으로 하여 모든 물이 평면적 위치에 있기 때문에 위치는 낮지만 그 평행선상의 기준은 변함이 없게 되어 있습니다. (선집 136-23)
꿀벌이 꽃송이를 찾아다니다가 꿀맛을 봤다 하게 될 때에는, 다리로 파고 들어가서 꽁무니를 떡 내밀고 빨아먹습니다. 선생님은 벌에 대해 잘 압니다. 꿀맛을 보는 벌을 핀셋으로 잡아당기게 되면 꽁지가 쑥 빠지더라도 안 떨어집니다. 참사랑은 그런 사랑입니다. 자기 생명까지도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계산해서 얼마 이익이 되니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까지도 버리면서 잊어버리고 갈 수 있는 길이 참사랑의 길입니다.
부모는 그 길을 갑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는 자식이 사지에 들어가게 되면 자식을 위해서 죽을 자리에 가려고 합니다. 사랑 앞에 자기 목숨을 묻고 가려고 하는 것이 부모 마음입니다. 그 사랑이 참사랑입니다.
어떤 사람이 세상에서 자랑할 수 있는 금은보화를 가졌고, 피땀 흘려서 엄청난 재산을 모았는데, 자식이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되면, 그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는 외적인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 생명까지 희생시켜서라도 살리려고 합니다. (선집 34-161)
우리가 사랑이라는 것을 중심삼고 볼 때에 부모가 자식을 향한 사랑의 한계점은 어디일 것이냐? 부모는 자식이 어릴 때에만 사랑해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생애를 통해서, 더 나아가 영원을 통해서, 사랑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보람을 느낄 수 있으며,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더욱 가치를 느낄 수 있는 부자관계가 맺어진다면, 무한한 힘과 무한한 자극과 무한히 새로운 그 무엇이 그 관계권내에서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성약 Ⅰ-1019)
어머니의 사랑이나 아버지의 사랑은 인간세계에 있어 가장 위대한 사랑 가운데 하나입니다. 세상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식 앞에서는 꼼짝을 못 합니다.
부모의 사랑은 자식 앞에 있어 무조건적이고 무한정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사랑의 모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큰 고아들은 무엇보다 부모의 사랑을 갈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아들은 잠자는 집이 있고, 먹을 것이 있다고 해도, 그들 가슴 속에 항상 부족함과 그리움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부모의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사랑하는 부모의 자녀로 태어났습니다. 그리하여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랐습니다. 나이가 많건 적건, 부모는 그 자식을 언제나 사랑하기 마련인 것입니다. 만약 70세가 된 아들이 있다 하더라도 옛날 자기가 기르던 그 기준을 가지고 자식을 바라보는 것이 부모의 마음인 것입니다. 연령은 많아져도 심정은 점점 가까워지고, 아들 대한 책임이 커질수록 아들을 위하는 마음은 더 넓어지는 것을, 우리는 세상에서 자식 대하는 인연을 보게 될 때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성약 Ⅰ-1020)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 뼛골이 녹아나도록 고생을 하지만 힘든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피살을 깎아주고 그 값어치가 얼마인지 장부에 치부(置簿)해 둡니까? 안 하지요? 오히려 몽땅 주지 못해서 안타까와 하는 것입니다.
여기 아주머니들도 그렇지요?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데, 먹지 않으면 왜 안 먹는가 하고 안타까와 합니다. 그것이 사실은 호스를 갖다 대고 자기의 피와 살을 뽑아가는 것이 아닙니까? 어떻게 보면 도둑 중에서 최고의 도둑이 아니예요? 그래도 그 어머니는 아이가 젖을 안 먹으면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도 좋아하느냐? 사랑의 법도이기 때문입니다. (성약 Ⅰ-1021)
어머니의 젖가슴을 파고드는 아기들을 볼 때 부모는 사랑을 중심삼아서 사랑을 촉감하고, 또 그 아기를 품음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행복보다도 천지가 평화의 경지에 들어가기 때문에 전체의 분위기가 좋은 자리에서 싹튼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아기가 아무리 극성스러워도 어서어서 해라 할 수 있는 아량의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는 자식을 무한하게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그 아기가 호스를 갖다 대고 피와 살을 빨아가는 원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어머니로서의 새로운 소망의 자극, 남편에 대한 새로운 자극, 그 아기로 말미암아 찾아지는 새로운 것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때에는 통하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그 경지는 누가 좌지우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약 Ⅰ-1021)
7) 부모의 사랑은 모든 사랑의 기준이요, 전통이 된다
무엇보다 부모의 사랑이 처음인 것입니다. 그 사랑을 동기로 해서 그 사랑에서 원만히 자란 사람이라면, 사랑이 어떻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사랑하기 때문에 부모 사이에 사랑이 어떻다는 것을 부모를 두고 배우게 됩니다. 그것이 자식들에게는 둘도 없는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체휼하는 것은 부모를 가진 자리가 아니고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자녀 사이의 사랑은 어떠해야 하느냐?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사랑해야 하느냐?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랑하듯이 형제들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누구로부터 배우느냐 할 때, 그것은 부모에게 배워야 합니다. (성약 Ⅰ-1018)
아들딸들이 어머니 아버지에 대해서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세계에서 제일 좋은 분이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존재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부간의 변함없는 마음과 사랑이 한결같은 것을 보고 자녀들이 '그 사랑을 본받아 자녀 된 우리도 하나되자!' 할 때 이상적인 가정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봅니다.
또한 어린이가 성장하여 사춘기가 되면 마음과 심정이 하나되는 상대를 찾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결혼을 통해서 이룰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지극히 존중하고 사랑과 심정의 기준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남자가 가야 할 길이요, 여자가 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어머니 아버지도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사랑에 일치되고 자식들도 부모를 닮아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사랑에 일치될 수 있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부모의 사랑을 중심삼고 형의 자리에 선 사람이 자기를 희생시켜 가며 부모 대신 동생들을 사랑하는 것이 사랑의 질서요, 전통입니다. 형님이란 자리는 형제들 가운데 제일 고생을 많이 해야 될 책임이 있는 자리입니다.
부모의 입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을 대신해 가지고 자식들보다 더 고생하는 자리가 부모의 자리입니다. 부모가 사랑을 중심삼고 자식을 위해서는 눈물이 교차되는 자리라 할지라도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자식들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 부모를 따라가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되게 될 때 천태만상으로 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간에 사랑을 하는 것도,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을 본받아서 형은 동생을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며 일원화된 가정은 가정애가 꽃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또 사회애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나아가 민족을 사랑하는 민족애가 됩니다. 이와 같이 사랑하면 세계애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부모의 사랑을 받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부부인 아버지 어머니가 서로서로 의지하고, 서로서로 사랑하는 그 동기가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알겠어요? 그러므로 그 동기를 중심삼고 형제끼리 서로 사랑하는 그 사랑은 변치 않을 것입니다.
그것을 중심삼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생각하며 생활할 때, 올바른 사회 환경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가정을 중심삼고 보면 그 가정이 소생이요, 사회가 장성이요, 국가가 완성입니다. 반드시 그런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가정과 가정을 전부 다 합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속에서 사랑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국가의 범위에서도 하나로 합쳐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회는 여러 계층으로 갈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회사에는 사장이란 대표자가 있지요? 그렇지요? 국가의 책임자가 지금 몇이에요? 하나지요? 하나의 책임자가 있게 됩니다. 이렇게 모양은 통일되는 것이고 형체만 커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갈라져 있으면서도 하나되는 것이 사위기대의 원칙입니다. (성약 Ⅰ-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