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창조 본연의 부부관계
하나님은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이성성상으로 계십니다. 이것을 플러스로 분립시킨 것이 남자인 아담이요, 마이너스로 분립시킨 것이 여자인 해와입니다.
1남과 1녀는 무형이신 하나님의 실체대상으로 나타난 아들딸입니다. 남자는 하나님의 플러스(+)성품을, 여자는 하나님의 마이너스(―)성품을 대신한 실체대상입니다.
창조이념은 양성(兩性)의 중화체(中和體)로 계시는 하나님의 성상(性相)을 이성(二性)으로 분립했다가 다시 하나님의 본성상(本性相)을 닮은 모습으로 합성일체화(合成一體化)하는 것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는 각각 하나님의 일성(一性)을 닮아 나왔습니다. 따라서 이들 1남 1녀의 결합은 하나님의 플러스(+) 성품과 마이너스(―)성품이 하나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닮은 중화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두 사람, 즉 부부는 하나님의 전체를 표상하는 결합체입니다.
남자는 하나님의 플러스(+) 성품을 대신함으로써 참아버지의 분신이 되고, 여자는 하나님의 마이너스(―) 성품을 대신함으로써 참어머니의 분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각각 하나님의 대신자이기도 합니다. 부부가 사랑으로 하나되는 것은 천주(天宙)를 품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우주적인 상봉입니다. 남편은 많은 남성을 대표하여 나타난 존재인즉 남편인 동시에 아버지의 대신이요, 오빠의 대신이며, 아내는 많은 여성을 대표하였은즉 부인인 동시에 또한 어머니를 대신하며, 동시에 누나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니,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지 않으려 해도 존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남자는 하나님의 양성적 형상이요, 여자는 하나님의 음성적 형상입니다. 부부는 천하를 한 보자기에 싼 것과 같습니다. 고로 부부는 하나님의 이상적인 사랑의 심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남자는 하늘을 상징하고, 여자는 땅을 상징합니다. 두 사람이 합하여 조화를 이루고 평행선을 이루어야 합니다. (성약 Ⅰ-868)
부부라는 것은 자기 하나에 국한된 부부가 아닙니다. 하늘 땅을 대표한 부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의 사랑의 완성이 우주의 완성입니다. 이 사랑이 깨지는 날에는 우주의 질서가 파괴되고 종적인 세계가 다 결딴나게 됩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좋아하여 포옹하는 그것 자체가 우주가 일체를 이루는 자리가 됩니다. 하나님의 이상 가운데 이루어지는 창조 본연의 모습은 그러합니다.
인간이 남자 여자로 태어난 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은 부부가 되어 하나됨으로써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성성상에 의해 분립된 실체이므로, 분립된 실체가 합성일체화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려면 남자와 여자가 사랑으로 하나되어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하나되지 않고는 하나님의 사랑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동위권에 머무르게 되는 것입니다.
동위권이란 하나님 옆에 설 수 있는 자리를 말합니다. 부부가 사랑을 중심삼고 완전히 하나된 터 위에 하나님 사랑을 중심하고 하나되게 되면, 그 부부는 하나님의 자리까지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가진 모든 것이 나의 소유권 안에 들어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힘은 이처럼 놀라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동참적 권위를 허락함과 동시에 그들은 하나님이 가지신 전체의 소유권한을 전수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의 소원은 천주를 지배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담이 품고 사랑한 부부의 가치는 세계의 중심가치를 대신했던 것입니다.
타락하지 않은 하나님이 지은 본연의 사람, 즉 본연의 남자와 여자를 중심한 그 사랑이 얼마나 거룩하고 가치가 있는가를 확실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성약 Ⅰ-969)
여러분은 천국이 어떤 곳이라 생각하십니까? 천국은 한마디로 말해 완성된 사람이 들어가 사는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천국은 참된 사랑을 지닌 완성된 사람이 들어가는 곳이라면, 그 참사랑을 지닌 사람이란 어떤 사람이겠느냐?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상적 사랑의 완성이 지상에서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느냐를 두고 볼 때, 남자와 여자를 떠나서는 이뤄질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완성된 사랑의 주체성을 지닌 남성과 여성이 아니고는 하나님의 사랑이 완성될 수 없습니다. (성약 Ⅰ-951)
참가정은 가정천국을 이루어야 합니다. 가정천국을 이루게 되면 틀림없이 지상천국이 이루어집니다. 왜 그러냐? 미래의 천국에 대한 실감을 현재의 입장에서 자극시키려니 불가피하게 상대가 필요한데, 가정에서 상대로 말미암아 그 자극을 받음으로써 미래의 천국이념을 오늘의 생활 감정에서 체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체득하기 위해서 부부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 자극으로 말미암아 부부가 영생할 수 있습니다. 발전은 자극이 없어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부부의 사랑은 이상천국을 건설할 수 있는 자극을 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미래의 기쁨을 현재권 내로 끌어다가 자극을 주어 가지고 추진력을 보급시켜 그 자리까지 가게 하는 것이 부부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 가운데는 나라의 사랑도 들어가 있고, 세계의 사랑도 들어가 있고, 하나님의 사랑도 들어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 사랑은 어디든지 무사통과입니다. 결국 천국에는 서로 사랑하는 부부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서 그런 사상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는 부부는 언제나 천국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이 네 마음 속에 있다'했지요? 그렇지만 오늘날 통일교회에서는 '네 가정에 천국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천국을 이룰 수 없다 할 때는 통일교회의 뜻이 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할 수 있다 할 때는 그 뜻이 이루어집니다.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들은 원리를 중심삼고 정도의 길을 가려 가야 되겠습니다. (성약 Ⅰ-875)
앞으로 천국을 이루려면, 그 부부끼리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결혼한 남자는 세계의 모든 여자들을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세계 모든 여성 가운데서 대표적인 반려자로서 내가 아내를 빼낸 것이다'이렇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또 여자들은 자기 남편이면 남편에 대해 그냥 한 사람의 남편으로서가 아니라, 온 세계 남성들 가운데 대표적으로 빼낸 사람이 남편이라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여자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면, 한 남자를 사랑하되 그 남자 한 사람만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세계 남성을 대표한 남자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 남성은 아버지를 대표하고, 오빠를 대표하고, 남편을 대표한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 남편을 아버지와 같이 생각해야 되고 더 나아가서는 할아버지같이 생각하고 그 다음엔 오빠같이 생각하고 동생같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인연을 통해 가지고 아버지를 사랑하고 할아버지를 사랑하고 오빠를 좋아하고 사내 동생을 좋아할 수 있는 그러한 여자라야만 상대를 얻을 수 있지, 아버지도 싫고, 오빠도 싫고, 할아버지도 싫고, 동생도 싫고, 다 싫고 그저 내 남편만 좋아한다는 건 하나님의 공약을 벗어난 자리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면, 전 세계 인류 남자도 전부 다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내포해 가지고 그 결실과 같은 남성을 내가 품고 사랑하는 것은 인류 남성을 대표해서 사랑하는 것이라는 관을 가져야 합니다. 내 어버이와 같이 내 오빠와 같이 내 동생과 같이 만국을 초월하여, 국경을 초월하여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수 있고 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통일교회 사상입니다. (성약 Ⅰ-875)
참된 남편은 '나는 태어나기를 당신을 위해 태어났으니 당신을 위해서 살고, 죽기를 당신을 위해서 죽을 것이다'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참된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이 상응하면서 스스로를 넘어서 상대를 위하는 원칙을 지닌 가정이라면, 이 가정은 이상적인 가정이요, 행복의 가정이요, 평화의 가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남자가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남자가 태어나게 된 동기는 남자 자신에게 있는 게 아니라 여자 때문에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여자가 없으면 남자가 태어날 수 있어요? 그 반대로 여자는 무슨 아름다운 화장을 하고 내가 미국의 무슨 배우라고 자랑해 봤자, 그 여자는 여자 때문에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남자는 어깨가 크고 여자는 궁둥이가 커야 잘 맞게 돼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사랑의 아내, 참된 이상적인 행복한 그 아내와 남편은 어디 있느냐?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서로를 위하고, 또 그런 마음이 일치될 때 이상적인 부부가 나옵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런 원칙을 두고 볼 때, 이상적인 사람 또는 행복하고 선한 사람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느냐 하면, 자기를 위해서 살려고 하는 데서는 찾을 수 없으며 남을 위해 살겠다고 하는 데에 근거를 두고 찾아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위해 생명을 바칠 수 있고, 아내는 남편을 위해 생명을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부부는 하나님의 사랑권 내에 연결되어 직접적인 보호를 받기 때문에 타락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성약 Ⅰ-882)
남자들은 자기 부인 사랑하기를 세상의 어떤 남자가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해야 합니다. 여자들도 자기 남편 사랑하기를 세상의 어떤 여자가 남편 사랑하는 것보다 더욱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참가정을 이룬 부부가 지켜야 할 사랑의 윤리인 것입니다.
참된 부모는 자식을 위해 살고 죽습니다. 거기에는 사랑이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사랑의 아내와 남편, 행복한 아내와 남편은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사랑으로 하나될 때 나올 수 있는 것이며, 또한 그것이 이상적인 부부입니다.
신랑 신부는 돈이나 권력, 명예를 중심삼고 하나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본연의 사랑을 중심삼고 일체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부부관계에 있어서는 남편이 돈을 벌어 올 때에 힘이 생겨납니다. 부인은 남편이 벌어 온 돈을 보고 힘이 나고, 힘이 나는 부인을 보고 남편도 힘이 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돈을 벌지 못하면 불안하고 부부관계가 깨어지기도 합니다. 참된 부부는 하나님을 중심하고 사랑의 일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참된 부부는 사랑을 중심삼고 점진적 발전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을 위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는 가운데, 두 부부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정을 꾸며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는 데도 하나님 대신자로서 남편이면 남편, 아내면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인간적인 자리에서 사랑하게 되면, 서로 부족한 면이 나타나게 되어, 결국에 가서는 이혼하는 사태까지 일어나게 됩니다.
요즘에 제주도 색시들이 시집갈 때 논 밭을 주게 되면 가져가서 수속할 때 색시 이름으로 한다나요, 언제나 남편과 헤어지면 내 것이라 주장하기 위해서. 그거 참 이상적 부부지요? 돈을 써도 이것은 남편 돈, 이것은 내 돈, 돈을 가져도 빤질빤질한 것은 내 돈, 구겨진 돈은 남자 돈….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돈 보따리를 펼쳐 놓고 쓰더라도 '어떻게 됐소?' '내가 썼지' '그래? 좋은 데 썼구먼. 쓸수록 좋고' 이래야 되는 것입니다.
입을 바르르 떨면서 에이구 또 썼구만…. 이것은 낙제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주더라도 무한히 줄 수 있고, 언제나 마음대로 깊은 곳이나 낮은 곳이나, 밤이나 낮이나 주고 받을 수 있게 될 때에 행복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려야 줄 수 없게 될 때는 불행한 것이요, 받으려야 받을 수 없게 될 때도 불행한 것입니다. (성약 Ⅰ-882)
우리 개개인은 몸과 마음이 상충되어 있으니, 마음을 중심삼고 몸을 하나로 만들어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임재할 수 있는 상대적 기반을 조성해야 합니다.
이런 남자와 여자가 축복을 받아서 완전한 사랑을 주고받으며 기쁨을 누릴 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지상에 핀 꽃과 같다는 것입니다. 또 그들의 사랑으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모든 조화 만상은 하나님께 향취와 같은 것입니다.
이와 같은 아름다운 꽃과 향취 속에 하나님은 살고 싶어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찾아올 수 있는 터전이, 곧 부부 사랑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모든 만물과 우주가 화동하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과 길을 가르쳐 주는 것이 통일교회요, 통일교회의 원리입니다. (성약 Ⅰ-889)
하나님께서 최고로 좋아하는 멜로디가 무엇이냐 하면, 남자 여자가 서로 좋아서 기뻐하는 영원한 부부의 웃음소리인 것입니다. 그런 부부가 세상을 이해하여 품을 수 있고, 우주 전체를 수용할 수 있는 마음으로 삶을 영위할 때 웃음은 자연발생적이 됩니다.
그런 남녀의 아름다운 모습이 하나님 앞에 한 송이 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단순한 이상이나 추상이 아닙니다. 본래의 세계를 말할 뿐입니다.
부부끼리는 앞산을 바라보면서도 저 산이 생겨난 것이 누구 때문인가를 물어 보고, 온 우주를 생각하면서도 이 우주가 생겨난 것이 누구 때문인가를 물어 봅니다. 그러면 나 때문인 동시에 너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부부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 우주가 생겨난 목적을 성사시키는 것이, 주체적인 목적을 중요시하는 것이 부부가 하나되는 길입니다. 부부는 마음을 중심삼고, 인격을 중심삼고, 사랑을 중심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부부는 같은 길로 가는 것입니다. 시골뜨기 아가씨라도 장관하고 결혼하면 어떻게 됩니까? 같은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 시골뜨기 여자가 초등학교도 못 나왔다 할지라도 모든 사람이 장관 사모님이라고 하면서 머리를 숙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부는 같이 가는 것입니다. 부부에게 그대 사랑이 따로 있고 내 사랑이 따로 있습니까? 그대 사랑이자 내 사랑인 것입니다. 네 사랑이자 내 사랑인 것입니다. 진짜 사랑은 온 몸이 하나되고, 심정과 핏줄이 전부 다 하나되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 부부입니다. 부부 없는 세상이라면 사는 맛이 있어요?
사랑하는 부부간의 대화를 볼 것 같으면, 세상의 어떤 시나 그림보다 아름다운 것입니다. 또 '사랑하는 사람끼리, 우리끼리, 우리 둘이서' 하는 말은 얼마나 아름답고 멋있는 말입니까? 좋기는 다 좋은데 그 중에서 제일 좋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상대자밖에 없습니다. 내가 '애야'하고 부르게 되면 상대적으로 '네에'하고 대답하고, '야'하고 부르면 '응'하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사랑하는 아내를 다정스럽고 부드럽게 '여보오' 부르면 다정하고 부드럽게 '왜 그래요' 하고 대답을 합니다. 하지만 퉁명스럽게 부르면 똑같이 '왜 불러' 하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산울림과 마찬가지로 다 상대적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에 취한 사람들의 웃음을 보면 그것도 상대적입니다. 남자는 웃을 때 눈을 더욱 크게 뜨는데, 여자는 웃을 때 지그시 감습니다. 남편의 눈이 커지고 아내의 눈이 점점 작아지면 그들 부부는 사랑에 취한 행복한 부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약 Ⅰ-888)
남자가 행복한 때는 어느 때이고, 여자가 행복한 때는 어느 때라고 여러분은 생각하십니까? 둘이 상대를 이루어 사랑을 주고받을 때를 행복한 때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대할 때, 주먹을 휘두른다거나 물리적 힘을 동원한다면 그들 부부는 결코 행복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대할 때, 힘으로 품안에 안고 보호하면서 사랑할 때 여자는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간의 사랑은 힘만으로도 안 되고, 마음으로 사랑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힘으로 확인해 주었을 때, 여자는 진정한 행복감을 맛볼 수 있을 것이고, 또한 여자가 남자를 대해 몸과 마음으로 사랑을 돌려줄 때 진실로 행복한 부부가 될 것입니다. (성약 Ⅰ-890)
사람에게는 항상 자극이 필요합니다. 행복은 자극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자극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항상 먹는 밥도 먹을 때마다 배가 고파야 맛이 새로운 것처럼 부부간의 사랑도 마찬가지로 항상 새로워야 된다는 것입니다.
부인과 남편이 서로 보면 볼수록 더욱 보고 싶고 온종일 함께 있고 싶어야 합니다. 사랑은 서로 그리워할 때 가치가 있습니다.
입이 있으면 입을 벌리고, 눈이 있으면 눈을 벌리고 사랑을 달라고 해야 사랑을 주는 사람도 기분이 좋지, 멍청하게 있으면 사랑이 오다가도 도망간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심각하지 않고 소극적으로 나올 때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사랑하는 사람끼리 같이 있는 것이 좋습니까, 떨어져 있는 것이 좋습니까? 가까이 있을수록 좋습니다. 왜 그래요? 모든 것이 한꺼번에 작용하기 때문에 좋다는 것입니다.
제일 좋은 것이 무엇이냐? 먹는 것입니까? 배고플 때 밥을 보면 좋다고 먹지만 그런 것은 일시적이라는 것입니다. 실컷 먹고 나서 또 먹을 것을 주게 되면 싫어합니다.
그렇지만 자기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만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나는 잊어버릴래. 싫어!' 하는 사람이 있어요? 봐도 봐도 자꾸 보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보아도 또 보고 싶고, 또 보아도 또 보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네가 앞에 서고 내가 뒤에 서고 하면서 수레바퀴같이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통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을 알고 난 아내는 남편의 가슴에 머리를 묻고 오수를 즐기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것은 행복에 취해서 정신을 바로 가질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무섭고 징그럽게 보이던 남자가 결혼하여 남편이 되고 나서는 보고 싶어서 하루에도 몇 번이고 보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여자입니다. 그래서 전화를 하여 점심시간에 잠깐 집에 다녀가라고 불러내기도 합니다. 사랑을 안 남자도 마찬가집니다. 틈만 있으면 아내의 무릎을 베개삼아 잠자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점심시간이나 커피를 마실 시간이나 할 것 없이 시간만 나면 집으로 달려오곤 합니다.
또 결혼하기 전에는 '그런 것이야 여자가 할 일이지, 어디 사내 대장부가 할 일이야' 하면서 안 하던 짓도 아내가 원하기만 하면 서슴없이 하곤 합니다. 이런 것들이 사랑을 알고 난 남자와 여자에게 흔히 일어나는 변화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시고 축복해 주실 때 부부가 행복해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한 축복의 문을 열고 들어선 부부는 둘이 속삭이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나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이렇게 기다려 왔습니다. 나의 생명은 당신을 통해서 그 가치를 꽃피울 것입니다. 당신을 사랑하기 위하여 태어났고, 또 오늘을 위해 기다려 왔습니다' 등등. 서로가 찬양하는 달콤한 이야기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랑의 밀어만큼 달콤한 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부부가 잠자리에 들어서도 속삭이는 밀어는 세상의 모든 피로와 미움을 녹이는 청량제가 되는 것입니다. (성약 Ⅰ-894)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중보로 만났을 때, 어떻게 사랑의 표현을 하느냐? 사랑의 발전과정을 보게 되면 첫째 입이고, 둘째 가슴이며, 셋째가 생식기입니다. 여자가 처음으로 남자를 만나 사랑을 시작하기 전에 부끄러움을 느끼고는 숨기는 것은 입이기에 손으로 입을 가리는 것입니다.
사랑이 입맞춤으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점차 성숙해지면 그 결실로 아들딸이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자에게 있어 생식기는 사랑의 성소인데, 그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는 남편만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남편이 부인의 사랑의 성소를 열 수 있는 열쇠를 두 개나 그 이상 가지고 있다면 그 남편은 사탄입니다.
또 부인의 성소가 남편이 가지고 있는 열쇠로만 열려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아무 열쇠를 가지고도 열린다면 그 역시 사탄인 것입니다. 남편이 가진 사랑의 열쇠가 부인의 성소를 열고 들어가면, 거기서 세상에서 가장 값지고 가치 있는 아들딸이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아들딸의 가치는 세상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의 결정체인 것입니다. 아들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인류 조상인 아담과 해와를 창조하셨던 심정을 체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아들딸을 보면서'이리 보아도 내 사랑, 저리 보아도 내 사랑…'하고 노래하며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태어난 아기가 무슨 짓을 해도 밉지가 않고 마냥 좋은 것은 그 아기가 자기의 피와 살로, 그리고 사랑으로 만들어진 분신체이기 때문입니다. 오줌을 싸고, 똥을 누고, 코를 흘려도 마냥 귀엽고 사랑스럽기만 한 것입니다. 그런 것들 속에 사랑이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성약 Ⅰ-894)
남편과 부인의 관계에서도 사랑이 강력한 힘으로 맺어졌다면, 상대가 무슨 짓을 하거나 어떤 일을 해도 기쁘고 사랑스러워야 하는 것입니다. 남편 몸에서 나는 냄새가 싫다고 한다거나 부인이 하는 몸짓이 싫다고 생각하거나 느끼는 것은 둘 사이에 완전한 사랑이 이루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부부는 목적을 위해, 이해관계로 맺어졌기 때문입니다. 결혼 후의 가정생활은 하나님을 한가운데에 모시고, 그 하나님이 함께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관계가 되어야 진정한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남녀가 결혼하여 서로 사랑하는 일은 본래 부끄러워 해야 할 일도 아닙니다. 이것은 가장 존엄한 일이며 신성하고 아름다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계율을 범하였기 때문에 사랑의 역사는 죄악으로 인해 수치스런 방향으로 흘러나왔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벌거벗고 춤추는 것을 누가 보았겠습니까? 그러니 사람이 없는 곳에서는 그런 일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방에서 부부가 벌거벗고 춤춘다고 그것이 걱정할 일입니까? 그러나 남들이 보는 앞에서 그런다면 그것은 사회에 지탄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부부끼리야 벌거벗고 춤 아니라 무슨 짓을 해도 누가 상관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축복가정들도 둘이 벌거벗고 춤도 추라는 것입니다. 부부끼리 하는데 무슨 상관입니까? 세상에 남자 여자가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우리 둘밖에 없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정성들이는 그 여자밖에 없다는 생각 속에 정성들이는 것이 원리입니다. (성약 Ⅰ-891)
진실한 행복이란 상대자와 함께 사랑에 취해서 웃고 노래하며 속삭이는 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으로부터 속삭이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귓가에 대고 사랑을 속삭이는 것은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행복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약 Ⅰ-371)
남편을 잃게 되면 여자는 왜 우느냐? 그리운 사람을 잃었기 때문에 슬퍼서 울게 된다는 그런 막연한 이유 때문만이 아닙니다.
사랑은 사방성(四方性)을 갖춰야 합니다. 그러면서 입체적으로 전후 좌우와 상관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랑이기 때문에 남편은 그 여인과 좌우 편에서 상대로서 사랑의 사방성을 이루게 되는 것이고, 따라서 이러한 아내는 남편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전우주가 보호하는 그 자리에서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되는 자리로 떨어지게 되니, 우주로부터 받는 힘이 고통으로 느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보면 왜 좋으냐? 혼자만 있을 때는 우주의 구형적(球形的)인 사방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기준에 서지 못했는데, 상대가 있음으로써, 그 상대와 주고받는 횡적인 사랑의 관계를 맺고, 종적인 우주의 힘과 접선할 수 있는 자리를 갖게 됨으로써, 우주의 보호력에 의해서 그 상대를 갖는 자는 무한히 기뻐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아내를 보면 온 정신이 통일되고 그 아내밖에 보이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게 되고 함께 어우러져 돌아가는 것입니다.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좋아하는 그런 일을 무엇 때문에 하느냐? 보호권을 확대하기 위해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레버런 문을 반대하지만, 그런 레버런 문이 미국에 가서 미국의 젊은이들과 밤을 새워가며 그들을 교육시키고 운동을 시키면서 때로는 그들과 함께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즐기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보호권 확대가 나와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우주 보호권 확대작용이 나와 더불어 시작하기 때문에 반대를 받고 감옥에 들어가게 된다고 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행복을 노래하고 뭐가 어떻다고 해도 혼자 사는 것이 행복합니까? 부부가 살다가 한 사람이 죽으면 슬프다고 엉엉 웁니다.
혼자서 자기의 갈 길을 준비할 수 있겠습니까? 왜 짝이 없으면 불쌍하다고 합니까? 천지가 기뻐할 수 있는 모든 중요한 날들 앞에 불합격자이기 때문입니다.
천지 법도의 규율 앞에 틀어졌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그 법도를 통해서만 천지의 운세는 돌아가고, 행복의 요건과 그 동기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슬프다는 것은 그만큼 법도에 멀어졌기 때문이며, 그러한 슬픔의 기준에 한해서는 천지 법도가 순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기쁘고 좋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사람을 세계에서 환영해 주는 자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슬픈 것은 쫓겨나는 자리입니다. 기쁨과 슬픔이 그렇게 갈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부부가 같이 살다가 한 사람이 먼저 죽으면 울게 됩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이 우주의 공법 앞에 불합격한 기준에 해당하면 이 우주의 공적인 힘이 그 사람을 밀어내게 되고, 또 그렇게 될 때에 슬픔의 강도가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기쁨은 어떻게 생기느냐? 그러한 우주 공법에 일치되는 자체가 되면 우주의 힘이 그를 안으려고 합니다. 그 힘이 크면 클수록 강하게 부여안게 되고, 강하게 안으면 안을수록 그는 그 내적인 중심에 들어가게 되기 때문에 기쁨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슬픔과 기쁨은 어디에서 벌어지느냐? 여러분 자신에게서 벌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힘의 원칙, 즉 우주의 공법을 중심삼고 벌어집니다.
그러면 그 우주의 공법이 무엇이냐? 남자와 여자가 맨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일치되어 가는 길이요, 또한 이 길이 천운이 가는 길입니다.
혼자서 가는 것이 아니라 남자 여자가 일치되어, 즉 부부가 일심이 되어 가는 길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이런 말 들어 봤습니까? 그러므로 서로 싸우고, 울고불고, 죽겠다고 야단법석인 사람들은 빨리 제거당합니다. 공적 법도권 내에서 합격품이 아닌 불합격품으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디로 갑니까? 쓰레기통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그것을 알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즉각적인 슬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성약 Ⅰ-902)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데 있어서 언제까지 사랑하겠느냐고 누군가 물었을 때, 젊었을 때까지만 사랑하겠다면 기분이 좋겠어요, 나쁘겠어요?
어느 때까지 사랑하기를 바라느냐? '영원히'이기도 하지만 죽을 때까지, 그 다음에 영원히 사랑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영원은 미래를 중심삼고 전체를 대신하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사랑하겠다는 것은 자기의 모든 것을 전부 주어 사랑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영원히'는 전체적이요, '죽을 때'까지는 몽땅 사랑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좋아하는 것입니다.
여기 아가씨들은 이제 시집가게 되면 남편에게 틀림없이 '당신, 날 사랑하오?' 하고 물어볼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면 '나를 몽땅 사랑하오, 조금 사랑하오?' 이렇게 물었을 때 몽땅 사랑한다고 대답해야 기분 좋아한다는 겁니다. 남자도 그렇다는 겁니다. 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조화가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결혼할 때 서로 죽도록 사랑하겠다고 합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할 때 그냥 죽도록 사랑한다고 하는 말과 '죽 -'하고 10년, 100년, 억만 년 하다가 '도록 사랑한다'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을 원합니까? 그냥 '죽도록 사랑한다'는 말을 원합니까?
여기 여자들 대답해 보세요. 그냥 '죽도록 사랑한다'는 말보다 '죽 -'하고 억만 년 하다가 '도록 사랑한다'는 말을 하면 더 좋아할 것입니다. 이것이 십 년, 백 년, 이렇게 길수록 더 좋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만나 가지고 '죽 -' 그 다음에 10년이 지나 가지고도 '죽 -' 또 50세가 넘어 가지고도 '죽 -도록 사랑한다'고 할 때,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그 아내는 자기 영감님이 어찌나 좋은지 모른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배가 나와서 뒤뚱거리더라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성약 Ⅰ-884)
참된 아내, 참된 남편은 어떤 사람인가? 사람은 어느 정도 성숙하면 가정을 이루게 되는데, 자기의 상대를 영원한 사랑의 상대로 생각하고 첫사랑과 더불어 날이 가면 갈수록 그 첫사랑에 플러스되는 사랑의 가정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 가정적인 사랑이 확대되어 종족을 이루어 영원히 사랑을 확대시켜 나갈 수 있는 영원한 사랑의 실체들로서 묶어지게 될 때, 그러한 부부는 참된 부부요, 참된 아내와 남편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런 부부가 하나님의 사랑에 동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약 Ⅰ-882)
아내의 눈에는 남편이 최고이며 제일로 보여야 합니다. 남편의 눈에도 아내가 그렇게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첫사랑으로 맺어진 인연이 최고의 인연입니다. 남이야 무슨 소리를 하든지 최고입니다. 이런 것은 몇 억 원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를 자기가 영원히 가질 수 있다면 이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모든 사람이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을 잘 따르고 잘 받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문학 작품이나 영화의 한 장면에만 나와서는 안 됩니다. 현실에서 일생 동안 그렇게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최고의 역사와 최고의 문화가 엎질러졌기 때문에, 선생님은 그런 세계를 세우기 위해서, 그렇게 살기 위해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나왔던 것입니다.
통일교회에서 말하는 이상적 부부란 어떠한 부부냐? 최고의 예술을 실체로 전개시킬 수 있는 부부입니다. 최고의 문학을 실체로 전개시킬 수 있는 부부인 것입니다. 최고의 이상, 세계 최고의 문화세계를 접하기 전에 최고의 사랑으로 부부가 주고받는 달콤한 사랑이 세계 최고의 예술작품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최고의 문학작품이요, 그 자체가 문학의 실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약 Ⅰ-8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