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하나님에 대한 모심의 예법
1)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야 한다
① 하나님과 인간은 부자의 관계
인연 가운데 표준이 되는 인연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부자의 인연입니다. 이 인연에서 비롯된 심정은 어떠한 존재의 권한에 의해서도 굽혀질 수 없는 영원하고 불변하고 유일한 것입니다.
또 이 심정의 권한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권한을 가지고 나타나게 될 때 모든 존재물은 그 앞에 머리 숙일 수 밖에 없으며, 이 심정의 권한을 가지고 움직일 때 만천하는 따라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우주의 철칙입니다. (7-105)
하나님이 창조 당시 이상으로 삼고 바랐던 참된 사랑, 위대한 사랑을 중심삼고 인간과의 사랑관계를 맺어 하나될 수 있는 신인애일체(神人愛一體)의 가정을 이루었더라면, 오늘날 우리들은 천국이니 지옥이니 하는 것을 염려할 것 없이 그냥 그대로 천국으로 다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장소가 어디냐? 사랑이 교차되는 중심, 생명이 교차되는 중심, 이상이 교차되는 그런 중심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사랑과 생명과 이상이 한 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가면 하나님도 사랑이요 나도 사랑이요, 하나님도 생명이요 나도 생명이요, 하나님도 이상이요 나도 이상이 된다 이겁니다. 그것을 결정지을 수 있는 최초의 인연과 최초의 통일의 장소가 부자관계가 이루어지는 자리가 아니면 있을 수 없습니다. 이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69-78)
여러분, 부자일신(父子一身)이라는 말이 도대체 무엇을 중심삼고 하는 말입니까? 그것은 사랑을 빼 놓으면 안 됩니다. 사랑과 생명과 혈통이 연결돼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요건이 필요해요. 부자일신이라고 할 때 거기에는 반드시 사랑과 생명과 혈통이 연결되어야 됩니다. (199-346)
말로서 맺어지는 부자의 관계, 예약만으로 맺어지는 부자의 관계는 필요없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아버지의 뜻을 위하고 뼈살이 녹아나는 고통 속에서도 참고 승리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과 부자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2-234)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그 최고의 자리는 어떤 자리냐? 그 자리는 바로 아들의 자리요, 딸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천정(天情)이 있고, 우리 인간에게는 인정(人情)이 있습니다. 이 인정과 천정이 서로 합할 수 있는 귀결점이 되는 자리는 절대자인 하나님도 원하고 인간도 원하는 단 하나의 자리, 즉 한 부모를 중심으로 한 아들딸의 입장에서 서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본래는 아담 해와가 서로 최고로 기쁜 가운데서 최고의 생명력이 발휘되고, 최고의 힘이 합하고, 전체의 이상력까지 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사랑의 꽃이 피어야 됩니다. 그래서 꽃과 같이 피어 가지고 그 향기가 온 천하를 덮고도 남을 수 있고, 하나님이 그 꽃을 바라보고 꽃의 향기를 맡으면서, 스스로 거기에 취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을 하나님은 꿈꿨던 것입니다.
아담과 하나님이 하나되어 서로 사랑이 넘치게 될 때, 아담은 하나님이 될 수 있습니다. 아담이 사랑으로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될 때에 하나님은 아담에게 거(居)하십니다. 성경에도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聖殿)인 것과 하나님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54-131)
하나님은 여러분과 가까이 계시고, 누구보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염려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세상에는 육친의 사랑이 제일 큰 줄 알고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그 보다 더 크고 깊으며, 세상의 그 어떤 인간적인 사랑보다도 깊고 큰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 안기어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고 '아버지의 서러움을 내가 알겠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입장에서 하나님의 내적인 심정을 체휼하는 참된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아들딸이 되어 하나님을 모신 천국을 소유한다면, 그 천국은 어느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입니다.(2-234)
부자일신이라는 사랑의 논리권 내에서는, 아버지의 것은 아들의 소유가 되는 겁니다. 남편의 것은 아내의 소유가 되는 겁니다. 사랑을 중심삼고는 상속권이 영원히 보장되는 것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자로서 인연을 맺은 아들딸이 되었다면, 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몸도 내 몸이요, 사랑도 내 사랑인 동시에 지으신 모든 것도 내 것이 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가운데는 천하를 점령하겠다는 본성의 욕심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분배해 준, 우주를 소유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딸의 권한을 이어 주기 위한 선물이었더라 이겁니다. (199-346)
모든 종교에서는 보는 것을 함부로 보지 말고, 듣는 것을 함부로 듣지 말고, 말하는 것이나 대하는 것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합니다.
보는 것도, 듣는 것도, 말하는 것도, 느끼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전부 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해야지, 자기 중심삼고 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66-231)
여러분은 하나님을 모신 자로서 기쁠 때 하나님을 얼마나 기쁘게 해드렸습니까? 여러분이 배고플 때 밥을 먹으면서 느끼는 고마움 이상 하나님을 모셔드렸습니까? 여러분은 좋은 것을 먹을 때나 입을 때, 그리고 슬플 때나 어려울 때에도 항상 하나님을 모셔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에 기억될 수 있는 사연들을 남겨 놓아야 합니다. (17-291)
나의 의식과 직관과 감각기관 일체까지도 아버지의 것이요, 내가 느끼고 의식하는 전체가 아버지의 것이라는 관(觀)이 결정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지 않는 한, 심정을 통해 움직이는 하늘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8-294)
인간은 누구라도 심정적으로 하나님과 하나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자식된 인간은 바로 심정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12-346)
우리가 말을 하고, 보고, 느끼고, 또 감정적으로 체감(體感)하는 일체(一切)도 하나님을 중심삼고 인연된 것이어야 합니다. (53-239)
우리는 하나님을 모시고, 부모를 모시고 사는 겁니다. 말을 해도 그렇고, 행동을 해도 그렇고, 자나 깨나 모시는 생활을 해야 됩니다. 이런 컨셉(concept;개념)만 가지면 24시간 사탄이 침범할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161-231)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첫마디 말을 하늘 앞에 바치고, 집을 나설 때도 첫걸음을 오른발로 내디디며, 하늘 앞에 바쳐야 합니다. 평소의 습관이 이렇게 된다면, 여러분의 생활은 시의생활(侍義生活)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들은 원칙적인 기준에서 생활태도를 취해 나가야 합니다. (17-296)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 느끼는 모든 감각, 동작이 하나의 목적을 중심삼아 언제나 직선상에 귀일(歸一) 될 수 있어야 됩니다. 그점을 상실하게 되면 뜻과 나와는 관계맺을 수 없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57-237)
천국은 모시는 생활을 한 것을 자랑하는 곳입니다. 그러면 그 천국은 어떠한 자가 가는 곳인가? 주를 믿고 복을 받기 위해 복을 앞세워 나가는 자가 가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모시기 위해 심정적으로 준비하는 생활을 한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준비하는 기간에 죽는다 해도 모심의 생활을 남기고 기쁘게 갈 수 있는 자가 가는 곳입니다. 거기에 부활이 있는 것입니다. (8-304)
이제는 삼합(三合;하나님, 참부모, 여러분)이 일치되어야 합니다. 보조를 맞추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내용이 달려 있기에, 삼자가 일치되는 점에서 하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점에 생명의 부활권이 있습니다. 그점이 하나되고 참부모와 여러분이 하나되어 일치될 수 있는 연결점입니다. 거기서 일심통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뜻과 일치된 생활을 해야 합니다. (31-321)
하루 24시간의 생활권내에서 내가 보고 듣고 했던 모든 일들은 무엇을 위해 보고 들은 것이냐? 하나님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보고 들어야 되고 느끼는 것도 하나님을 위해 느껴야 합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천상세계의 생활과 연결시켜 생활해야 합니다. (35-284)
매일같이 그리워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시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그리워하든 항상 그리움에 사무쳐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밤 12시만 되면 '야야! 자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걱정을 끼쳐 드리는 사람입니다. 천국은 밤과 낮이 없습니다. 심정의 인연을 안고 나올 때는 밤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17-293)
본래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된 후에는 나 중심삼고 살고, 나 중심삼고 생각하고, 나 중심삼고 사랑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걸 확실히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는 자기를 중심삼고 생각하고 자기를 중심삼고 사랑해도, 그것은 하나님을 중심삼은 생각이 되고 하나님 중심삼고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그것이 원칙이라는 겁니다. (92-166)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과 인연 맺기 위해서 얼마나 정성들였느냐 하는 것이 자신의 재산입니다. (50-288)
여러분들은 눈물의 골짜기에서 아버지를 부를 때 응답받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눈물짓는 자리에서 '아버지' 할 때 '오냐 내가 여기 있으니 참아라', 피 땀 흘리는 고통이 사무치는 자리에서 '아버지여!' 할 때 '내가 참았으니 너도 참아라' 하시고, 죽음이 닥쳐오는 그 순간에도 '내가 있으니 안심해라' 하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여러분들이 돼야 합니다.
그런 자리에서 얼마나 아버지를 모셨으며, 얼마나 아버지와 더불어 의논했으며, 얼마나 아버지와 더불어 살았느냐 하는 게 문제가 되지, 영광의 자리에서는 아버지를 아무리 불러봐야 문제가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아버지께서 영광의 날을 보시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1-102)
'아이고, 나 배고파! 아이고, 밥 밥 밥!' 이러는데 그거 누구를 위해서 먹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위해 먹겠다고 그래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 하나님을 위해 먹는 것이라 하느냐? 내가 하나님의 완전한 성전이 되었다면 하나님의 성전인 '내가 배고프면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 밥을 먹자고 하신다.' 이렇게 생각하라는 겁니다. 그렇게 밥을 먹으면 그 밥은 거룩한 밥이라는 겁니다. 밥이 밥님이 되는 겁니다. (92-166)
① 모심으로 생활의 천국화 이룩
하나님은 망상적이고 관념적인 하나님이 아닙니다. 추상적인 하나님이 아닙니다. 생활적인 주체성을 지니고 늘 우리가 살고 있는 생활의 주인으로서 함께 있는 것입니다. 모심만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적인 사랑을 중심삼고 공동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하나님입니다. 꿈같은 얘기입니다. (168-72)
하나님을 마음 가운데 모시고, 우리 인간이 몸 자리에서 완전히 하나될 수 있는 기원을 만들지 않고는, 이 악마의 세계를 청산할 길이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모심의 시대, 시의(侍義)의 구원시대라고 보는 겁니다. 모심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하나님은 저 공중에 동떨어져서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생활권내의 주체자로서 하나님을 모셔야 됩니다. (144-231)
여러분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하루에 몇 번이나 자각합니까? 24시간 가운데 몇 번이나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느낍니까? 모심으로 구원을 받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24시간 가운데 한두 시간 정도 모셔 가지고 되겠습니까?
공기보다도 절박하게 필요한 것이 하나님입니다. 물보다도 절박하게 필요한 것이 하나님입니다. 밥보다 더 귀한 것이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렇게 느껴져요? (33-214)
이제부터 여러분들은 모심의 생활을 해야 됩니다. 지금까지의 신앙생활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신앙생활이었지만 앞으로는 모심으로 구원을 얻는 시대입니다. 본래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을 모심으로써 우리가 갈 길을 가는 것입니다. 모시는 데는 여러분의 생활과 마음으로 더불어 모셔야 됩니다. (161-218)
모심의 생활을 해야 할 우리입니다. 소망의 천국은 맞이했으나, 모시고 실천하면서 생활할 수 있는 천국은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즉 생활적인 면에서 주체되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6-193)
우리가 이렇게 배우고 듣고 모심의 생활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6천년 동안 인류가 허덕여 나온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경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사정을 알고 하나님의 심정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민족이나 국가는 말할 것도 없고 개개인을 놓고도 부모의 심정을 갖고 대하고, 상처를 당하고 유린을 당하고 배척을 받고 찢기며 나오신 그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8-235)
성약시대는 사랑의 시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할 수 있는 겁니다. 지금까지의 종교시대에는 사랑을 허락치 않았기 때문에, 고차적인 종교는 결혼을 허락치 않았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96-117)
하나님은 우주의 중심존재이시므로 그 앞에 가까이 가면 천년만년 주관받더라도 더 주관받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은 모심의 도리가 그렇게 돼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 인간도 그러한 자리에서 주관받을 수 있으면, 그 이상의 행복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습니다. (77-308)
믿음의 의니, 행함의 의니, 모심의 의를 추구하는 것은 왜냐? 의롭지 않고는 선악을 분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악한 세계와 선한 세계가 갈라지지 않습니다. 그 라이처스니스 스탠다드 포인트(righteousness standard point;선의 기준점)가 되는 것이 뭐냐?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믿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행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모시는 것과 같이, 언제나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건 왜 그래야 되느냐?
사탄은 하나님과 같이 의로운 자에 대해서는 참소할 수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믿고, 하나님이 행하고, 하나님이 생활하는 모심의 환경에 처해 있으면 사탄이 간섭할 수 없습니다.
사탄권 내에 있더라도, 그런 환경에서 하나님과 같이 할 수 있는 의로운 기준이 벌어지면, 사탄은 거기서 후퇴하는 것입니다. (161-218)
행함의 구약시대가 지나가고, 믿음의 신약시대가 지나가고 모심의 성약시대만이 있는 게 아닙니다. 성약시대가 되더라도 행함이 필요하고 믿음이 필요하고 모심의 생활도 다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것은 소생, 장성이 있고 장성 위에 완성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건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입니다. (161-218)
통일교회에서는 모심으로써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시의(侍義), 즉 모심으로써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춘하추동 양복을 해 입는 남자들이 있으면 아버지께도 해드려야 됩니다. 그분이 체(體)를 가진 분이 아니기 때문에 대신 정성을 모았다가 한 절기가 되면, 그 모은 정성을 누가 보나 안 보나 자기 혼자 교회를 위해 하나님을 모시는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연보궤에 드리게 되면, 그 정성은 법궤에 쌓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관념적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체화(體化)되고 표현될 수 있는 생활이 되어야 됩니다. (48-261)
모심의 생활은 왜 해야 되느냐?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78-30)
지금까지의 신앙생활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었지만 앞으로는 모심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본래 타락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을 모심으로써 우리가 갈 길을 다 가는 것입니다. 믿기는 뭘 믿어요? 모시고 생활함으로써 다 되는 겁니다. 모시는데는 여러분의 생활과 마음으로 더불어 모셔야 됩니다. (150-213)
이제는 개인이면 개인으로서 하나님을 모시는 생활, 가정이면 가정으로서 하나님을 모시는 생활, 교회면 교회로서 하나님을 모시는 생활, 혹은 이 나라 이 민족을 중심삼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모심의 기준을 어떻게 새로운 전통으로 설정해 놓느냐 하는 것이 문제됩니다. (38-7)
통일교회시대는 부모님 시대입니다. 하나님이 땅에 임할 수 있고, 하나님이 오실 수 있는 길을 닦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오시게 될 때 모심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성립되는 겁니다. 역사는 그렇게 발전하는 것입니다. (177-85)
모심의 자리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슬퍼해 나오셨던 하나님을 위로해 드릴 수 있고 슬픈 정성의 사연에 동참할 수 있는 내용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것을 소개하고 그에 따르는 탕감조건을 하나님 앞에 세우기 위해 나온 것이 복귀원리입니다. (17-227)
여러분들은 모심의 생활을 해야 됩니다. 그러면 모심의 생활은 왜 해야 되느냐?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먼저 모셔야 됩니다. 하나님을 모셔야 된다는 겁니다. (78-30)
하나님을 모시는 데에는 법도가 있습니다. 그 법도를 어길 때에 하나님은 노여워하십니다. (17-287)
여러분은 생활 속에서 법도를 지킬 줄 알아야 됩니다. 하늘이 요구하는 천국의 법도를 지키고, 또 천국 법도를 지킬 줄 아는 동시에 천국생활을 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천국생활을 할 줄 아는 동시에 천국의 사랑으로 하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슬퍼하시는 것을 항상 감별하면서 사는 사람은 악한 사람이 되려 해도 될 수 없고, 하늘의 법도에 어긋나려 해도 어긋날 수 없습니다. 그런 남자는 아무리 미인이 유혹하더라도 안 넘어갑니다. 거기에 동화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40-274)
오늘날 가정을 탈피하는 불행한 청년 남녀가 많은 원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천륜의 법도에 일치된 사랑이 상실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정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그 가정에 좌정(座定)시킬 수 있는 천지부모가 현현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21-128)
주체를 위한 대상의 자리는 불평이 있을 수 없습니다. 불평하는 것은 망동입니다. 파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길은 불평을 불허합니다. 감사만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걸 알아야 됩니다. 하늘은 언제나 주체로 계시기 때문에 주체와 더불어 상관된 운명을 가지고 그를 이탈하는 생활의 법도, 생활의 형태는 있을 수 없습니다. (58-310)
천리는 순서를 올바로 지키는 데서 성립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와 대상 관계에서 하늘은 절대적인 주체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 주체를 무시하는 사람은 대상이 못됩니다. 절대적인 주체 앞에 절대적인 대상이 되려니 절대적으로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은, 가정에 들어가 사랑하는 것까지도 전부 대상과 주체 입장에 서 가지고 하늘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일체가 그런 것입니다. 그런 가정은 망하지 않습니다. (58-310)
최후에 남아질 것은 뭐냐? 하나님 플러스 인간, 신인(神人), 신인의 삶의 길, 신인 생활관입니다. 인생관도 마찬가지로 신인 인생관, 신인 세계관 그것이 막연하게 하나님을 대해 사람이 알 수 있는 정도의 자리가 아니라, 사람이 영원히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자리입니다.
왜? 하나님과 사람은 본래 떨어져서는 안 될 자리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떨어지지 않았어야 할 자리, 그 이상의 자리에 도달해야 합니다. 그런 자리에서 신인(神人)이 하나된 생활적인 무대, 세계적인 무대를 요구하고 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65-127)
승리적인 주관권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절대적인 신념을 갖고 모심의 생활을 중심삼아 일체적인 입장에서 생활해 나가야만 승리적 기대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복귀의 길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14-237)
주체를 위한 대상의 자리는 불평이 있을 수 없습니다. 불평은 망동이요, 파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길은 불평을 불허합니다. 감사만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걸 알아야 됩니다. 하늘은 언제나 주체로 계시기 때문에 주체와 더불어 상관된 운명을 가지고 그를 이탈하는 생활의 법도나 형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58-310)
① 지성감천(至誠感天)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라는 말은 무슨 말이냐? 그것은 생명을 바치라는 말입니다. 그 이상은 무엇이 있어요? 마음을 다하라는 것은 생명을 내놓으라는 말입니다. 뜻을 다하라는 것도, 정성을 다하라는 것도 생명을 내놓으라는 말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지요? 지성의 한계점, 내마음의 끝이 어디겠어요? 생명을 걸고 정성을 들이라는 겁니다. 목을 내놓고 죽을 각오를 하고 정성을 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이 모른다고 하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38-242)
생명을 내놓는 데는 억지로 내놓는 것이 아니라, 미칠듯이 좋아하면서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생명을 내놓을 바에는 울면서 내놓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겠어요, 아니면 좋아서 미칠 것 같고, 죽어도 좋다고 하면서 춤을 추면서 내놓는 것을 좋아하시겠어요? 어떤 겁니까? (48-114)
선생님이 마루바닥에 엎드려 기도할 때는 눈물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여기(무릎)에 굳은 살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 하는 말이 있잖아요? 하나님을 위해 공을 들여야 됩니다.
하나님이 그리워서 미치리만큼 사무친 경지에까지 들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 땅이라면 뭐 하루에 천만 번 왔다 가고 싶은 마음이 있으나, 그런 땅이 아니기 때문에 할 수 없어서 선생님을 보낸 겁니다. 그런 무엇이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선생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괜히 그렇게 정(情)이 가요?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때에 동삼(冬三)에 솜바지저고리를 전부 다 눈물로 적실 때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혔겠나 생각해 보십시오. 칼을 꽂아 놓고 담판 기도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60-212)
여러분, 여기에 다이아몬드 광(鑛)이 있다고 합시다. 자기만 아는 그런 곳이 있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그것을 위해서 자기 가정도 팔아야 될 경우가 생길 것입니다. 부인을 팔아 수많은 가정을 구한다면, 그건 죄가 아닙니다. 자식을 팔아 나라의 수많은 아들딸을 구한다면 그것 또한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팔아서는 안 됩니다. 그 광산이 나라와 민족을 살릴 수 있는 길이요, 세계 만방의 인간들이 살 수 있는 길이라 할 때는 부인과 자식을 팔았다고 해서 역사 앞에 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를 살리기 위해, 세계를 살리기 위해 부인이나 자식을 파는 것은 안 될 것 같지만 오히려 세계가 찬양할 수 있는 보화의 근원이 깃들 수 있는 것입니다. (21-314)
밥을 먹으나 물을 마시나 앉으나 서나 누구를 대하나 부모님 앞에, 하늘 앞에 온 심정을 보일 수 있는 것으로 만점입니다. 지식이나 학식이 많아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나 아무개 박사요!' 그러고 살겠습니까? 그것 필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어떻게 인도할 수 있느냐? 단 하나의 길은 '지성이면 감천' 이것 외에는 없습니다. (22-28)
선생님의 일생 모토는 '하나님의 대변인'이었습니다. 오늘부터는 여러분이 대변인이 되어 주기를 부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대역자(代役者)가 되고, 하나님의 대신 존재가 되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대사자(代死者)기 되어 주기를 바랍니다. (9-7)
엄청난 역사적인 종말시대에 누구도 신임할 수 없는 고독한 자리에 계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가 신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있겠습니까? 죽어도 좋다는 겁니다.
내 육신이 물이 되어 흘러간들 무슨 한이 있고 가루가 되어 날아간들 무슨 한이 있느냐 이겁니다. 세상에는 개돼지처럼 죽어가는 무가치한 인생이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개도 안 뜯어 먹는 것입니다. (62-140)
불평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불만 가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내가 불평하면 부모님이 얼마나 아플까? 그분의 사정을 내가 알고 그분의 전통을 이어받을 수 있는 한 순간이 내 앞에 찾아들어오면 그것을 이어받고 그분을 따라가면서 그분을 위로하겠다.'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서 눈물짓는 그 자리에 하늘이 같이하는 겁니다.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울고, 부모님을 위해 울어야 됩니다. 이것이 통일교회 제단이요, 통일교회의 모심의 생활이라는 걸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114-281)
하나님의 사랑과 더불어 산다고 하였으니, 이제 여러분의 생활 목표는 어떠해야 하는가? 사랑의 심정을 가지고 모심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손수건을 대해 경배해도 우상 숭배가 아닙니다.
사랑의 심정을 가지고 머리 숙이는데 그 무엇이 지배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의 영광을 초월하여 심정으로 경배드리면 사탄이 더 그러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천주의 심정을 통해 나가는데는 우상이 없는 것입니다. (9-174)
선생님은 배가 고파 지쳐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염려하는 그 길을 내가 앞놓아 갈 것이냐, 짊어질 수 있는 십자가의 길이 있다면 어떻게 그 길을 갈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이러한 길을 가려고 준비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은 모심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을 알면서도 뻔뻔스럽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에서 멈추면 안 됩니다. (13-216)
선생님이 무엇을 하시는지 모르면 밤잠이 안 와서 한밤중에라도 뛰어와서 물어보고 갈 수 있는 그런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심으로 구원받는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은 하나님에 대해 언제나 그렇게 삽니다. 촌분(寸分)도 방심하지 못합니다. (21-68)
여러분은 시의시대, 즉 모심의 생활을 하는 시대에 있어서 정확한 중심을 두고 나가야 됩니다. 하나님을 모시는 데에는 법도가 있습니다. 그 법도를 어길 때에는 하나님은 무척 노여워하십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자식의 말 한마디에 가슴에 못이 박혔다 빠졌다 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도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노여움이 많으신 분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노여움을 사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선생님도 선생님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려고 합니다. (17-287)
여러분도 여러분을 생각해 주는 사람을 찾아가지요?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하나님을 점령할 수 있는 길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위해 봉헌하겠다고 하는 그 사람을 중심삼고 하나님은 찾아가는 겁니다. (9-160)
선생님은 하나님 앞에 솜바지저고리가 다 젖도록 기도한 적이 몇 번인지 모르고, 칼을 가지고 뱃가죽을 찌르며 맹세한 적이 몇 번인지 모르며,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마음을 굳게 다짐한 적이 몇천만 번인지 모릅니다. (19-19)
인간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 계명인데, 사랑하는데는 죽도록 사랑해야 됩니까, 일시적으로 사랑해야 됩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죽도록 사랑할래요, 죽도록 사랑하지 않을래요? 벼락을 맞아 죽더라도 사랑해야 됩니다. 하나님을 죽도록 사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죽도록 사랑해야 된다면 죽기 전까지는 못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37-25)
여러분은 눈이 뭉그러지고 코가 메이도록 울면서 그리워해야 합니다. 사람이 너무 울면 가슴이 아픕니다. 그만큼 사무치게 그리워해야 합니다. '아버지!' 하고 부르는데 있어 사형장에 끌려가는 아들의 입장에서 아버지를 부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요, 다른 먼 나라로 떠나는 아들의 입장에서 애절하게 아버지를 부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를 부를 때 그런 기준 이상이 되어야 됩니다. (50-288)
백두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거기에 반석을 갈아 밭을 일궈 가지고 감자를 심어 그 감자로 하나님을 봉양할 수 있어요? 그거 해야 합니다. 그 때는 소가 없어서 사랑하는 아내를 소 삼아 밭을 일구었다면 벼락을 맞겠어요, 안 맞겠어요? 아내를 소 삼아서 밭을 일군다 할 때 하나님이 '야야 ! 그만 둬라!' 한다면 하겠어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정성을 다하라!' 했으니 하겠어요? 해야 합니다. (37-25)
여러분은 현재 어디에 있습니까? 밤이나 낮이나, 언제 어디 가든 선생님과 더불어 보조를 맞추어 살고 있습니까? 지금까지 선생님은 이 머리 가지고 살아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이 가는 방향에 보조를 맞추면서 모든 생명을 다 투입하며 살아온 것입니다.
선생님은 하루하루의 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는 반드시 하나님께 기도해서 해결합니다. 주먹구구식으로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43-33)
이 길을 가기 위해서는 미욱해야 됩니다. 충신들은 어떻게 보면 미욱한 사람들입니다. 조금은 미련해 보입니다. 곰같은 성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팔을 잘리고도 '아이구, 여기 덜 잘랐다, 더 잘라라!' 하는, 그와 같은 미욱한 점이 있어야 합니다. 곰이나 멧돼지는 총에 맞아서 걸리적거리는 부분이 있으면 그 부분을 입으로 잘라 버리고 도망갑니다. 죽음은 나중에 생각하고 우선 걸리적거리는 것을 잘라 버립니다. 그런 미욱한 무엇이 있어야 됩니다. 충신 열사는 미욱해야 합니다. 조금은 어리석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26-143)
하나님을 해방해야 합니다. 참된 하나님의 권위를 중심삼고 이상경에서 인류 시조와 함께 무한한 행복을 찬양하며 살 수 있는 가운데 모심을 받으면서 지내실 하나님이 이렇게 비참하게 됐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우리의 손으로 해방시키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제안입니다. 그러한 내용이 종교계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지극히 기쁜 소식입니다.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
이렇게 볼 때, 불교를 세우신 분도 하나님이요, 유교를 세우신 분도 하나님이요, 회회교를 세우신 분도 하나님이요, 기독교를 세우신 분도 하나님이시니, 모든 종교가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합니다. (176-221)
선생님은 지금까지 뜻을 위해 고생해 나왔고, 지금도 자나깨나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선생님을 가까이에서 모셔 보지 못한 사람은 선생님을 잘 알지 못합니다. 선생님은 자다가 눈만 뜨면 엎드려 기도합니다. 왜 그러한 생활을 하고 있느냐? 이 한밤에도 세계에 널려 있는 사랑하는 자녀들이 나를 의지하며 하나님을 위해 기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정성으로 같이하지 못하더라도 거기에 못지 않게 박자를 맞춰 줘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생님이 잠을 잘 때에는 모르니까 하나님께서도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시간에는 자식이 고단해서 잠자게 되면 아버지가 지켜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대신 기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26-138)
레버런 문은 어떤 사람이냐? 한 가지 재간 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미욱하게 그저 똑바로만 가는 사람입니다. 아, 입을 좀 다물고 적당히 돌아가면 될텐데, 왜 자꾸 욕먹게끔 작용을 하고 그러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아야 한 고개를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지요? 그러면 왜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끊어 버리고 가야 되느냐?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에 이끌리면 곧게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곧은 길을 찾아 오셨기 때문에 곧게 가야 된다는 겁니다. (97-257)
하나님이 그렇게 외로운 분이고, 하나님이 그렇게 고독한 분이시기에 내가 죽는 날까지 그의 뜻과 그의 소원을 하나라도 풀어 주고, 그 분야의 한 터전이라도 확대시켜 하나님을 위할 수 있는 사람을 모으는 것이 사명인 줄 알고 나온 것입니다.
욕을 먹어도, 매를 맞아도 복수할 줄 모르고 사랑으로 참아나온 것은 하나님의 자식으로 태어났기 때문이고, 그분의 뜻을 세워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전통을 어떻게 세우느냐를 생각하면서 비틀걸음으로 혹은 허리를 꾸부리고 배밀이를 해 가면서 이것만은 남겨야 된다고 하며 싸워 나온 것입니다. (82-47)
인간은 자기가 섰다고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가 세워 놓아 봤자 넘어진다 이겁니다. 그렇지만 인간이 세워 주지 않더라도 하늘이 세워주면 반드시 된다는 겁니다. (155-242)
참부모가 하는 것이 무엇이냐? 모든 것을 승리해 가지고 하나님의 마음 깊은 데까지 찾아 들어가서 한을 해원하고, 그 승리권을 지상에 이루는 겁니다. 그러한 참부모가 출현했다는 것을 여러분은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235-21)
여러분은 뜻길을 걸어 나오면서 얼마나 심각해 봤어요? 선생님은 일생 동안 그런 길을 걸어온 것입니다. 처자도 모릅니다. 하나님만이 알아요. 고독단신 외로운 사나이가 가는 길을 그 누구도 모르는 가운데 하나님이 협조해서 놀랄만한 실적을 가지고 오늘날 이 사회에 문제를 제시했고, 또 피폐해 가는 이 민주세계의 사상권 내에 새로운 파급을 제시하는 문제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것도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같이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82-45)